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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Nov 26. 2021

엄마 앞에선 여전히 아홉 살

빨리 먹고 얼른 나아라


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살림살이에 보탬이 된다면 이것저것 일을 가리지 않았던 엄마에게 있어 '부업'이란 그야말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신 내지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둥그렇게 모여 앉아 스웨터의 삐쳐 나온 실밥을 정리하거나 누런 낚시 바늘을 하나하나 꿰고 있는 장면은 더 이상 새로운 풍경이 아니었다. 반질거리는 종이봉투를 턱턱 붙이는 옆에서 숙제를 겨우 마치고 나면, 엄마는 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못난이 인형의 머리털을 코바늘에 끼우고 있었다.


잘 살아 보려는 굳은 의지가 있으니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여성의 사회 참여나 경제 활동은 오히려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당연히 손가락질할 것임을 엄마도 잘 알고 있었다. 바람이 났네, 남자가 따로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벌이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남의 집 파출부나 식당의 허드레 주방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아홉 살이던 그 해에는 엄마가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 그날도 그랬다.


새벽부터 열이 나고 배가 아팠다. 학교에 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침내 등교 시간이 되었다. 결석해도 될까 엄마에게 조심스레 물어보려던 참인데 먼저 눈치를 챈 누나가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그 모습에 지레 겁부터 먹은 나는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죽더라도 교실에서 죽어라.”

조퇴를 할지언정 결석만은 절대 안 된다는 단호한 명령이었다. 우등상은 못 받아도 개근상은 포기할 수 없다는 누나의 신념에서 나온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은, 아픈 나를 집에 두게되면 하루 종일 밖에서 일을 해야하는 엄마의 마음이 잠시라도 편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헤아린, 누나의 재빠르고 현명한 판단었던 것이다. 결국 엄마는 나를 업고 집을 나섰다.


교실 의자에 나를 내려놓고 돌아서던 엄마가 갑자기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쥐며 말했다.

“오뎅(어묵) 볶아 놓을 테니까 집에 가면 밥 꼭 먹어라, 알겠제?”

하마터면 왈칵 울 뻔 했다. 엄마와 나를 번갈아보는 반 아이들 때문에 겨우 참았다. 물에 데친 시금치처럼 추욱 늘어진 채로 그날 하루를 버텼던 것 같다. 양호실 가서 쉬라고 선생님은 걱정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참을 수 있다 끝까지 버텼다. 수업에 참석하지 않으면 결석으로 처리된다고,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수업하기에 수월하니까 선생님이 그러는 거라고, 똑똑하기 그지없는 명수가 그전부터 그랬다. 가방을 대신 고 힘겹게 부축을 해 준 병철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집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을 돌려보낸 다음,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한기寒氣를 쫓아보려고 이불속으로 발을 뻗는데 무언가 닿는다. 밥상이다. 엄마가 했던 말이 그제야 다시 생각났다. 그렇지, 오뎅 볶아두었다고 그랬지? 조심스레 이불을 걷었다. 밥과 국, 작은 냄비가 놓였다. 덮어둔 이불 덕분에 아직 차갑게 식지는 않았다.

밥뚜껑을 열려는데 국그릇 밑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작은 종이가 보였다. 집어들었다.


‘밥 묵고 빨리 나사라(밥 먹고 빨리 나아라).’


삐뚤빼뚤 엄마의 글씨였다. 한글을 잘 모르는 엄마가 정성을 다해 한 글자씩 또박또박, 작은 종이를 가득 채웠다. 맞다, 엄마 말이 맞다. 내가 아프면 엄마가 걱정한다. 밥 먹고 얼른 나아서 엄마를 도와주자.

어린 아홉 살은 그렇게 숟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에 갑자기 코 안에 물이 들어찼다거나, 까닭 없이 눈앞이 어른거렸다고 기억하는 것은, 그날을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꾸며보려는 오늘의 과장誇張일 것이다.




조금 무리다 싶더니 결국 몸살이 났다. 환경이 바뀐 것을 애써 무시하고 나름 전력 질주했던 탓이 크다. 호텔을 내게 맡긴 형은, 그때의 엄마처럼 옆에 서서 내 걱정을 했지만 모든 것이 정상화되려는 중요한 시점이라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일이다.


잠든 부모님이 깰까 봐 늦은 귀가는 언제나 조심스럽기만 한데 현관문에 붙은 잠금장치는 멋도 모르고 목청을 높였다. 그 바람에 엄마가 잠에서 깼다.

“조금 춥네요.”

그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을 찾던 중, 하얀 메모지 하나가 저만치 식탁 위에서 손을 흔든다. 오래간만에 보는 낯익은 글씨다.


잘 먹었어요, 엄마


냉장고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나, 여기 있어.’ 갈비탕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비닐봉지 하나가 고운 자태로 앉아있다. 아침 일찍, 근처의 유명 식당에서 엄마가 손수 사 온 것이 틀림없다. 그래, 엄마 말이 맞다. 빨리 먹고 낫자. 빨리 나아서 엄마를….

갈비탕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메모를 다시 한번 읽는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내게 ‘~하게’체를 썼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이제는 잘 안다.


첫 숟갈을 뜨는데 문득 오래전 그날이 생각났다. 새삼스럽다 싶어 손에 든 메모를 다시 내려다보는 순간, 갑자기 훌쩍하며 코 안으로 물이 들어찼고 눈앞은 아주 살짝 어른거렸다. 그 이유는 확실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제 아무리 오십이 넘었어도 엄마에게 나는 아홉 살, 여전히 아홉 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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