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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Nov 19. 2021

그래도 니하오마 (2)

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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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욕 좀 가르쳐 주십시오.”

수업이 끝나갈 무렵,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칠판을 지우던 왕王 선생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원래 크던 눈이 더욱 커졌다.

“중국어 욕 말입니다. 한번 들으면 치가 떨릴 만큼 아주 쎈 걸로.”

왕 선생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함께 수업을 받는 철우 형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 저 멀리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탕 사장님, 내가 미스터 임 모르게 비표 바꾸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 알아, 안다구. 그래서 늘 짜오 자네에게 충분히 사례를 하고 있잖아.

- 배드 샘플 Bad Sample 찾는다고 냉동 창고 안에서 덜덜 떤 것을 생각하면, 어휴. 그나저나 이번에는 클레임을 얼마로 할 생각입니까?

- 대략 일만 불 정도? 괜찮겠지?

- 실제 클레임은 이만 불이니까 사장님은 일만 오천 불 정도로 깎아주면서 미스터 임에게 충분히 생색내세요.

- 알았어.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는 말, 저 미스터 임이 못 알아듣는 것 맞지?

- 그럼요, 걱정 마세요. 저 녀석은 영어밖에 할 줄 몰라요.


녹음테이프를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공교롭게도 하이라이트 부분이 재생되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네 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섯 시부터 시작하는 중국어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서둘러야 했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지만 물은 차갑다기보다 여전히 시원했다.


상하이에서 돌아오던 그날, 바로 중국어 초급 과정에 등록했다. 저녁 시간대의 수업은 대부분 마감되었고 새벽 다섯 시에 시작하는 직장인 반班이 그나마 여유가 있다고 했다.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담당 강사는 왕 선생이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녹음의 번역을 도와준 사람이 바로 왕 선생이었다. 베이징 사범 대학에서 십 년 동안 유학했다는 자기소개를 나중에 들었다.

수출입 은행에서 근무하는 철우 형은 나의 유일한 수업 동기였다. 새벽반에는 일반인 수강생이 한 명 더 있었는데 대략 이삼일 정도 나오다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철우 형은 내년에 베이징 지사로 파견 갈 예정이어서 회사의 지원을 받아 중국어를 배운다고 했다. 나는 그저 취미삼아 외국어 하나를 익혀두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그 이야기를 할 때 왕 선생은 알 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중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회사 선배는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숨겼다. 수업이 끝나면 교재는 학원 캐비닛 속에 넣어 숨겼다.

자정 즈음에 잠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다섯 시부터 중국어 수업을 들은 후 한 시간 운동을 마친 다음에 출근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외근이 없는 날, 점심을 먹고 나면 당연히 졸렸다. 어쩌다 컴퓨터 모니터에 머리를 쿵 박으면, 클레임이나 맞고 다니는 주제에 졸기까지 하냐며 양대리가 바람난 시어머니처럼 구박을 해댔다. 하지만 이미 이골이 난 잔소리여서 별다른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주말을 기다려 이태원으로 갔다.

상인들에게 물어 굳이 화교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인터넷 맛집 검색 등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렵사리 중국 요릿집을 찾게 되면 잠시 기다렸다가 한창 바쁜 점심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하고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먹기엔 조금 많다 싶을 정도로 여러 가지의 요리를 시킨 다음, 조심스럽게 사장님을 청했다. 요리에 문제가 있나 싶어 걱정이 얼굴에 가득한 사장님에게 대략의 설명을 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어를 빨리 배우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라고, 제발 나를 도와 달라고.

자초지종을 듣고 난 대한각 사장님은 껄껄껄 특유의 넉넉한 웃음과 함께, 그런 거라면 이렇게 많은 요리를 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짜장면 한 그릇이면 충분하다는 말로 나를 격려했다.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 얼추 한 시간 동안 사장님으로부터 알찬 수업을 받은 뒤,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설 때면 나는 언제나 짜장면 한 그릇보다 넉넉한 값을 치렀다. 부담스럽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사장님 때문에 계산대 위에 돈을 올려놓고 도망치듯 달려 나올 때도 있었다.


이태원만으로 안 되겠다 싶을 때에는 목적지를 바꿔 인천항이나 김포 공항으로 갔다.

오래전 부산 해운대에서 일본어 공부를 할 때와 똑같은 방법이 동원되었다. 무례하고 무모했지만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절박한 심정이었다. 중국어를 빨리 배워야 했다. 그리고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가이드 아닌 가이드가 되어 그분들의 숙소까지 짐을 들어 드릴 때도 많았다. 어쩌다 내 또래를 만나 선생님이 되어 주기를 청한 다음, 나는 한 번도 빠짐없이 그렇게 물었다.

“욕 좀 가르쳐 줄 수 있니? 듣기만 해도 벌벌 떨릴 정도로, 아주 무시무시한 욕 말이야.”




- 탕 사장님, 클레임 일만 오천 불 중에서 오천 불은 저한테 주셔야 해요.

- 안돼. 수입 가격이 많이 올랐어. 나도 남는 게 없다고. 이번엔 이천 불만 줄게.

- 사장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처음부터 제 커미션은 건당 오천 불씩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 그건 맞는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잖아.

- 아니 씨X, 다르긴 뭐가 달라? 다른 업체에 갈 물량도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밀어줬는데. 더 비싼 수입 가격을 제시한 업체도 마다하고 내가 왜 사장님에게 오징어를 주라고 했겠어?

- 이것 봐, 짜오.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지금은 조금 어려우니까 이번에만 이천 불 받아. 지금까지 꽤 많이 받아갔잖아.

- 어려워? 나 때문에 그동안 번 게 얼만데? 웃기지 마세요. 내가 놀면서 돈 받았어요? 들키면 회사에서 잘릴 각오하고 한 거라구요. 잘 들으세요, 사장님. 사장님에게 오징어를 파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고, 앞으로는 다른 업체한테 팔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약속을 따로 정해서 저녁을 같이할 만큼 친해진 철우 형이 소주잔을 건네면서 말했다.

“진우 씨,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 회사에 바로 알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진우 씨가 난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어서 그래.”

형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고작 일개 사원이 혼자만의 감정에 사로잡혀 어설픈 단죄를 꿈꾸고 있다는 것, 누가 보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며 철우 형의 말대로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회사에서 오히려 나를 질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결과를 떠나서 이번만큼은 내 생각대로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짜오에게 꼭 해 줄 말이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식당을 나서는데 우리와 동행했던 왕 선생이 내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전화번호라면 나 몰래 살짝 줘야죠, 라며 철우 형이 놀렸다. 그것을 받는 순간 잠시 설렜다. 레이코 선생이 스치듯 떠올랐던 것도 사실이다. 왕 선생 역시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인가? 여기서 펴 봐도 되냐고 물었다. 왕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한 눈빛이었다. 철우 형도 짐짓 궁금한지 몸을 슬며시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조심스레 종이를 폈다. 노란 바닥에 고운 글씨가 빽빽했다. 한 글자씩 조용히 그것을 읽다가 곧 멈추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국어 욕설이었다. 단숨에 읽어내지도 못할 만큼 엄청나게 많았다. 정말 친절하게도 이 욕은 어떤 뜻인지, 이 욕은 어떤 상황에서 쓰는 것인지 빨간 볼펜으로 주석까지 하나하나 달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왕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말이라곤 그저 그것뿐이었다.


쎼쎼, 왕 선생.


중국에서의 오징어 수요는 계속 늘어나서 요청 물량을 맞추기가 빠듯할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내가 출장을 가는 횟수도 늘어났고, 짜오를 만나는 일 역시 더욱 잦아졌다.

중국어를 배우는 동안 출장이 계속되었고, 출장이 이어지는 동안 중국어를 공부했다.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도 벌써 여섯 달이 지나고 있었다. 출장이 거듭될수록, 수업이 반복될수록 내 귓속으로 중국어가 천천히 들어왔다. 도착한 상하이 공항에서,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체크인을 하는 프런트에서, 하역 중인 선박에서, 점심을 먹는 식당에서, 그리고 탕 사장과 짜오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탕 사장님, 이번이 마지막 거래인 거 아시죠?"

"이것 봐, 짜오. 대체 왜 그래?"

"하여튼 그렇게 아세요. 하역 마치고 저녁에 이별주나 하시죠."

"짜오, 정말 그러기야? 짜오, 짜오. 이것 봐, 짜오!"


홱 돌아서서 저만치 가버리는 짜오의 등에 대고 탕 사장이 내뱉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그것은 분명 욕이었다. 탕 사장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보처럼 웃어 주었다. 그리고 짜오를 향해 뛰어갔다. 출항을 알리는 배의 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11월 10일, 출장 일주일째 되는 날의 아침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짜오에게 영어로 물었다.

“짜오,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짜오가 급히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탕 대표가 미스터 임에게 접대도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제가 공연히 화가 나잖아요.”

“접대는 무슨, 내가 어디 놀러 왔나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씁쓸했다.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겠다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짜오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다음,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곧장 부두 하역 사무실로 향했다. 짜오가 한국어를 모르는 것은 분명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혹시 나처럼 남몰래 죽기 살기로 한국어를 공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짜오의 방과 나란히 붙어있는 내 방에선 어떤 경우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我可以一会儿拨打国际电话吗? 我会全额支付费用(잠시 전화를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요금은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반년 넘게 알지낸 하역 반장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가 왜 놀라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살짝 웃어 주었다.

“왜? 무슨 일이야? 또 클레임이지? 이번엔 얼마야?”

수화기 속에서 양대리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작정했던 이야기를 토하듯 쏟아냈다.

지난 일들을 되짚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양대리의 격앙된 분노와 함께, 길었던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본사에서 직원을 보낸다고 했으니 이제 그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허탈함도 허전함도 아닌 또 다른 무엇이었다. 주머니를 더듬었다. 하필이면 담배가 없었다. 여전히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하역 반장에게 물었다.

“大哥,你介意借我一支烟吗? (큰 형님, 담배 한 개비만 빌려 주시겠습니까)”




저녁이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짜오와 탕 사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짜오가 앞장선 그 뒤를 따랐다. 언제나처럼 그 식당이었다. 짜오가 특별히 조용한 방을 요청하는 것을 들었다. 아, 저런 말이었구나.

탕 사장이 내게 자리를 권했다. 마지막 날이라며 상석을 가리켰지만 극구 사양했다. 그것을 보는 짜오의 표정이 이상했다. 애써 무시했다.


잠시 후 평소처럼 요리가 나왔고 술잔이 돌았으며 또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왜 그러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이제는 대략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돈을 못 주겠다 그거지요?”

“못 준다는 게 아니라 오천 불은 어렵다는 거지. 내 사정 좀 봐줘.”

“그럼 거래는 이번이 마지막인 걸로 아세요.”

“짜오, 수입업체를 자네가 결정해? 여기 있는 미스터 임이 하는 거잖아.”

짜오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한껏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씨X, 이 녀석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중국어도 못하는데 무슨 일을 해요? 본사 놈들이 다 똑같아요. 지금 저렇게 웃고 있잖아요. 자기 욕을 해도 몰라요.”

텁텁한 것이 목에 걸렸다. 지금이 타이밍일까? 나는 주머니를 더듬었다. 녹음기는 이상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참을까?

“짜오, 그러면 내가 먼저 미스터 임에게 말하겠어. 이때까지 네가 얼마를 받아먹고 어떤 짓을 했는지."

“마음대로 해. 이 사람이 당신 말을 믿을 것 같아? 내가 내일 본사에 보고하면 끝이에요. 우리 거래선을 다른 곳으로 바꾼다고. 이번 클레임은 지급할 필요 없다고. 미스터 임은 형식적인 담당자라고요, 그냥 장식이란 말입니다.”

이 녀석이 지금? 차라리 중국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백 퍼센트 완벽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처를 받기에 충분한 뉘앙스가 칼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

“미스터 임은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한다구요, 알겠어요?”

짜오가 나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짜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웃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야, 한국X, 너 내 말 알아들어? 알아듣겠어? 내가 무슨 말하는지, 내가 탕 사장과 지금 어떤 대화를 하는지 알겠어? 모르지? 모르지? 당연하지. 넌 중국어를 못하니까.”

바로 지금이다. 육 개월 동안 갈고닦은 칼을 꺼낼 순간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있는 힘을 다해 탁자를 내리쳤다. 음식을 담은 접시가 사방으로 튀었다. 짜오가 한 발 뒤로 주춤했다. 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闭嘴! 这个混蛋! 我听到你说的一切! (입 닥쳐, 이 새X야. 네가 지껄이는 소리, 전부 알아들으니까.)”


짜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탕 사장도 할 말을 잃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틈을 주지 말자. 이제 왕 선생에게 배운 욕을 던질 차례였다. 니먼, 하려는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왈칵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성큼 들어섰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3부 마지막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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