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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Nov 17. 2021

그래도 니하오마 (1)

그 겨울, 복수혈전


전화기 너머의 양대리는 전에 없이 격앙되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분노의 대상이 이번엔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게 전부 사실이란 말이지? 이 자식들을 어떻게 박살 내지? 막내야, 조금만 기다려. 본사에서 바로 직원을 보낼 테니까. 그때까지 건강 잘 챙기고, 알겠지?”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말투에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양대리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면 그렇지.

금세 허탈해진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잠시 멎었던 겨울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갑판 위의 작업자들이 또 바빠졌다.

수백 명이 넘는 인부들이 하역을 서두르느라 정신이 없는 벌크선 전용 부두. 여기는 상하이 양산항 上海 洋山港, Yang Shan Gang, Shanghai, 그리고 오늘은 1997년 11월 10일, 중국 출장 일주일 째다.




그 해 봄, 해외 출장을 가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꿈에 부풀었다. 입사 동기들 중 가장 먼저라는 칭찬은 그 꿈에다 바람을 잔뜩 불어넣는 것이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몸에 꼭 맞는 검정 슈트, 날렵하게 잘 빠진 서류 가방, 번쩍거리는 구두, 쏟아지는 태양을 가릴 선글라스도 일찌감치 챙겼다. 머리는 당일 아침에 빗어 넘길 계획이었다. 출장의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보름달만큼 부푼 기대는, 출장 전날 양대리로부터 준비물 목록을 전달받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작업용 질긴 바지, 면 장갑, 고무장화, 방한모자, 마스크, 전자저울, 그리고,


팬티 넉넉히


팬티라는 낱말을 보았을 때 품에서 막 권총을 꺼내려던 007을 얼른 머릿속에서 쫓아내야 했다. 하긴 그렇지, 그게 맞지. 준비물의 목록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팀의 담당 품목은 다름 아닌 수산물이었고, 나의 출장 목적은 상하이 양산항에서 오징어 하역 작업을 참관하고 인근 냉동 창고에서 최종 검품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90년대 후반, 중국인들의 경제 수준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그들의 외식 문화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무엇보다도 인기를 끌었던 것이 ‘오징어’였다.

끓는 물에 제대로 삶은 오징어를 보기 좋게 잘라 석쇠에 올려서 잘 구운 다음, 상추나 채소를 곁들여 먹는 것이 당시 중국 가정의 주말 외식 풍경이었다.

당연히 오징어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다. 그러나 중국 연안에서는 그것에 적합한 품질 좋은 오징어가 잡히지 않았다. 한국의 동해에서 포획되는 연안 오징어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쌌다. 결국 선택된 것이 저 멀리 포클랜드 수역에서 잡히는 아르헨티나 오징어였다.


오징어 위에 적힌 알파벳은 크기를 표시하는 약자입니다


한국의 조업 선사들이 현지 수역水域에서 오징어를 낚고, 그것을 옮겨 실은 운반선은 우리나라를 향해 출발한다. 그러는 동안 중국의 수입업자와 계약을 맺은 우리 회사가 최종 도착항을 알려주면 운반선은 그곳으로 목적지를 변경하고, 우리는 하역 일자에 맞추어 도착항으로 담당자를 파견한다. 하역을 마치고 검품을 한 다음, 정산까지 완료하고 나면 일이 마무리된다. 그 일들을 진행하기 위해 현지로 가야 하는 본사 담당자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성룡과 주윤발은 중국어 대신 액션만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출장 일정을 조율해서 상하이나 따롄 大連, Dalian 지사에서 통역 전담 직원을 내게 보냈다.

현지 채용 직원, 줄여서 현채원이라 불리던 지사원들은 때로는 본사 직원보다 더 뛰어난 업무 역량을 보일 때가 많았다. 따롄에서 온 현채원, 짜오 신 Zhao Xin도 그랬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렸지만 입사는 일 년 정도 빨랐다. 짜오의 아버지는 따롄시市 산하 기관의 공무원이고, 본인은 호주에서 유학을 했다. 그래서 영어가 아주 유창했다. 짜오와 나는 당연히 영어로 대화를 했다.


“짜오, 이거 골치 아픈데요. 또 클레임이 나올 것 같아요.”

“그러게요. 이번에도 역시 동결 허용치(Glazing Allowance, GA)를 넘어설 것 같지요?”


수산물 거래에 있어 GA는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오징어를 냉동할 경우 자연히 얼음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오징어 중량에 더해지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래서 하역 후의 검품 과정에서 실제 중량 체크는 필수다.

GA는 3% 수준에서 합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중량 100KG인 오징어 냉동 블록을 상온에서 자연해동한 다음, 오징어 한 마리 한 마리를 뜯어내서 중량을 체크하고 그것을 다시 더한다. 그 합계가 97Kg 이상이면 100KG의 값을 정상적으로 계산한다. 3Kg 이내의 얼음은 섞여 있더라도 총중량으로 인정해준다는 의미다. 그러나 만약 97Kg이 되지 않으면, 부족한 수치만큼 전체 물량으로 환산하여 클레임을 청구당한다.

물건 외에 얼음 무게에 대해서도 값을 치렀으니 그것은 자신들에게 돌려달라는 것이다. 말은 맞는 말이다. 얼핏 적은 금액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운반선은 보통 일만 오천 톤급이다. 단위 클레임을 화물 총량에 대입하면 전체 금액은 엄청나게 커진다. 때로는 이익이 한 푼도 남지 않는 사태가 생기기도 한다.


그 해 진행한 모든 거래에서 우리는 번번이 크고 작은 클레임을 당하고 있었다. 전 과정을 꼼꼼히 되짚어 보니 결국은 샘플링이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팔십만 개가 넘는 18킬로그램짜리 오징어 블록을 하나하나 달아볼 수는 없다. 그래서 수출업자와 수입업자가 냉동 창고 안에서 임의의 샘플을 고른 다음, 다음날 그것의 무게를 측정하는 것이다. 좋은 샘플을 고르면 당연히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

나는 영하 사십 도의 냉동 창고에 들어가 제일 좋은 블록에 몰래 비표를 붙여 놓느라 간밤에 잠도 설쳤다. 당연히 짜오도 나와 동행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검품에서 또다시 GA를 넘어서는 결과가 나와버린 것이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수입업체의 대표가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고향에 있는 삼촌 뻘은 되어 보였다. 클레임은 클레임이지만 관계는 관계인 것이다. 다음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도 그와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 대표가 주는 술을 받고, 다시 대표에게 잔을 권했다.

술잔이 제법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갑자기 짜오가 언성을 높였다. 대표도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맞받았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난데없는 다툼에 놀랐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한참을 그러다가 겨우 정리가 되었다.

호텔로 돌아온 뒤에도 둘이서 다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출장 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계속되는 클레임에 화가 난 짜오가 검품 방식을 바꾸자고 수입업체 대표에게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구나. 속으로 기특했다. 비록 현채 직원이지만 회사의 이익을 위해 정말 열심히 싸워주는구나.

그것이 내심 고마웠던 나는 이후로 출장을 갈 때마다 짜오, 짜오의 여자 친구, 그리고 짜오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최종 검품을 마친 날 저녁에 우리가 머무는 호텔 식당에서 마무리 회식이 진행되었다. 이번에도 클레임은 발생했다.

짜오는 또다시 대표와 얼굴을 붉혔다. 짜오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한테 삼촌뻘인 대표님에게 지나친 행동 아니냐, 라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종업원이 들어왔다. 출장올 때마다 묵다보니 가벼운 눈인사를 건넬 만큼 낯이 익은 식당 직원이었다. 그녀의 한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허리에 한 손을 걸치고 삿대질을 해대는 짜오를 슬쩍 흘겨본 그녀가 슬그머니 곁으로 오더니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내속삭였다.

“What a stupid! You are deceived now (이 바보야, 넌 지금 속고 있어).”


술병을 내려놓은 그녀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라고? 속고 있다고?

다음날 아침, 체크 아웃을 하던 프런트에서 그녀를 찾았지만 하필이면 휴무라고 했다. 연락처를 묻기엔 변명이 궁색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의 말은 잊히지 않았다. 속고 있다? 무엇에 속고 있다는 말일까? 혹시, 어쩌면? 양대리에게는 보고하지 않았지만 찬찬히 따져보면 그간의 일 중에 몇 가지 의심이 가는 정황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었다. 속단해서도, 발설해서도 안될 일이었다.


다음 출장 일정이 잡힌 어느 주말, 용산 전자 상가로 갔다. 그리고 소형 녹음기 한 개를 샀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였다.




또다시 술잔이 돌았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제대로 녹음이 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역시나 짜오는 대표와 변함없이 말싸움을 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다툼이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는지 짜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대표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Why?”

단숨에 술잔을 비운 대표가 더듬거리는 서툰 영어에다 화를 섞었다.

“He, Very, Bad!”




김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곧장 종로로 향했다. 라디오 광고에서 자주 들었던 외국어 학원 앞에 내렸다.

안내 데스크에 앉은 직원에게 중국어 선생님을 급히 찾고 있다고 말했다.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일 줄 알았더니 레이코 선생 같은 내 또래의 젊은 여자 선생님이 나왔다.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물었다.

양해를 구하고는 자리를 옮겨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비용을 충분히 지불할 테니 녹음에 담긴 중국어를 내게 해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명함을 받고서야 겨우 안심이 되었던지 선생님이 먼저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녹음이 흘러나오는 동안, 선생님은 아무런 말없이 무언가를 계속 적기만 했다. 내가 앉은자리에선 알아보기 힘든, 아주 작은 글씨였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났다. 재생이 저절로 멈추었다. 테이프가 끝난 것이다.

나는 마음을 졸이며 선생님의 말을 기다렸다. 안경을 고쳐 쓴 선생님이 짧은 한숨을 쉬고는 첫마디를 꺼냈다.

“음, 임 선생님. 녹음 속에 나오는 이 젊은 사람, 참 나쁜 사람이네요.”




반 갑이 넘는 담배를 피웠음에도 화가 삭지 않았다. 어떻게 짜오가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감쪽같이 나를 속일 수 있을까? 둘이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 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한 편에서 음식이나 꾸역꾸역 먹고 있던 나는 얼마나 한심한 존재로 보였을까? 영문도 모르고 상대가 웃으면 그저 허허 웃고, 상대가 낄낄거리면 바보처럼 따라 낄낄거렸던 나를 얼마나 하찮게 보았을까?

"저 바보는 우리가 자기 욕하고 놀리는 줄도 모를 거야."

"당연하지.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니까, 하하하."


녹음 자료를 회사에 제출하고 절차대로 처리하면 간단히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끝내자 하기엔 내 마음 한 구석에 불편함이 남았다. 내가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데, 내가 얼마나 믿고 의지했는데. 짜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안 된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절대로 순순히 끝내지는 않겠다.


결심은 끝났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한 번 더 철없는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담배를 껐다. 손을 저어 연기를 흩뿌린 다음, 학원 문을 힘차게 밀었다. 여행용 트렁크가 털컥 문턱에 걸리는 소리를 냈다. 부서진다 한들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2부에 계속됩니다]





Image by AllenMilligu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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