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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Dec 22. 2021

제이쌤, 도와주세요

조언을 위한 조언


교육을 담당하던 강사가 갑자기 교체된 다음, 서둘러 강의 일정부터 바꾼 것은 순전히 내 의지 때문이었다. 연초가 되면 신년 행사다, 설 기획이다 해서 모든 호텔이 일제히 바빠질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 올해가 가기 전에 어떻게든 면접 일정이라도 우선 잡아두고 싶었다. 그러려면 취업 지원자, 즉 우리 학생들의 빈틈없는 사전 준비가 필수 조건이다.


흔쾌히 내 계획에 따라주긴 했지만 처음 공지되었던 일정보다 삼 주씩이나 앞당겨 스케줄을 진행하다 보니 학생들의 고생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원찮은 선생을 만난 탓에 학교 때도 하지 않았던 예습에다 심지어 복습까지 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이 과정의 고생을 보상해줄 거라는 판박이 구라를 날려가며 어제의 교육 일정 역시 계획대로 무사히 잘 마쳤다.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제이쌤.”


제이쌤, 교육원에서 통용되는 내 호칭이다.

학생 중 하나가 어느 날 무심코 그렇게 부른 것을 시작으로 금세 모두가 애용하는 호칭이 되었다. 교수님, 강사님, 선생님,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이쌤으로 불리는 것을 나 역시 가장 좋아한다. 그 이유는 비밀이다. 조금 젊어 보인다는.


돌아보니 현수 양이다. 현수 양은 유명 헤어숍에서 손님들의 머리를 다듬어주던, 미용사 출신이다.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서비스에 자신감이 붙다 보니, 이젠 더 큰 무대에 도전하고 싶어졌다는 것이 현수 양의 호텔리어 교육 과정 지원 동기였다.

키가 크고 눈도 부리부리하니 스쳐 지나는 누구나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전형적인 미인이다. 본인의 의지가 강해서 수업 시간에도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나를 향해 레이저를 뿜뿜 쏘아대며 공부에 한창 열심이다.

“제이쌤, 저, 상의드릴 것이 있는데요.”


거리 두기가 강화된 시국이라 저녁 열 시에는 마땅히 자리를 옮길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건물 입구에서 몇 발짝 떨어진 길 위에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들이 저만치 가 버린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현수 양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저는 밤마다 부업을 하고 있는데요, 제이쌤.”

나는 조용히 현수 양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미용사 일을 그만둔 다음, 현수 양은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소개로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해운대에 있는, 모던 바 Modern Bar 스타일의 술집이었다. 거기서 현수 양이 해야 될 일은,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 그대로 술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흔한 룸살롱이나 주점의 접대부와 다른 점이라면, 높게 솟은 스탠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거리를 띄워 앉기 때문에 불필요한 신체 접촉이나 취객의 지저분한 손길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며 친구는 설명에 열을 올렸다.

그래 봤자 술집에서 일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거부감에 처음엔 몇 차례나 거절했지만 본인이 선을 지키면 불쾌할 일이 전혀 없다는 말과, 무엇보다도 짭짤한 수입이 주어진다는 것, 그 수입의 액수가 친구의 제안을 아예 무시만은 할 수 없는 강한 유혹으로 느껴졌다. 이른바 ‘착석’이라고 부르는 밀접 서비스가 아닌, 그냥 스탠드 서빙만 한다 해도 하루 일당이 이십만 원, 팁까지 포함하면 족히 삼십만 원이 넘는 돈을 매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생활비가 아쉬웠던 현수 양은, 고민 끝에 우선 며칠만 하고 곧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으로 일단 시작했는데 (현수 양 표현을 따르자면) 점점 돈맛을 보게 되니 매일 새벽 세 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게 되었단다.

점점 현수 양을 찾는 단골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걸 본 사장이, 이제는 그만 고상한 척하고 착석 서비스까지 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가라며 은근히 채근하는 탓에 최근 들어 마음이 복잡하다고 했다. 그 복잡함의 이유가 사장의 말을 들을지 여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분명 자기는 그 일을 그만두고 호텔의 길을 걷고 싶은데, 당장 손에 쥐게 될 수입의 차이를 생각하면 선뜻 결심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이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호텔로 취업하고 싶은 제 마음은 변함없는데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돈도 사실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서, 제이쌤. 도와주세요.”


호텔 일은 전형적인 3D 업종 중의 하나이다. 세계 속의 한국, 자랑스러운 부산, 늠름한 호텔리어가 두 팔 벌려 여러분을 맞이합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포스터 속의 미소와는 달리 호텔에서의 업무, 직원들의 일은 실로 고되다. 그것을 여기에 나열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신입 직원이 받는 첫 월급이 너무 적다. 고작 이백 만원 남짓이다. 그것도 신입 딱지를 붙이고 있을 때는 더 줄어든다.


내키지는 않지만 하룻밤 여섯 시간 남짓 근무하고 이삼십만 원을 버는 그 일과, 정말 하고 싶은 일이지만 한 달 꼬박 근무하고 이백만 원 겨우 손에 쥐는 호텔 일을 두고서 현수 양은 현실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답을 구하는 간절한 그녀의 눈빛을 억지로 외면했다. 도덕 책에서 읽은 것처럼 너의 미래가, 직장이란 말이다, 장차 엄마가 될 여자로서, 따위의 말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남자라는 족속들은 왜 하필 그런 데서만 술을 먹느냐라는 의미 없는 질책도 목구멍 뒤에 숨었다. 고작 한다는 소리는 이것이었다.


“그렇군요,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군요. 음, 아직은 교육 일정이 남았으니 시간을 두고 생각해봅시다.”


무언가 그럴듯한 답을 원했을 것이 분명한 현수 양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옮길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거리 두기가 아쉬웠는데 그 순간만큼은 거리 두기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를 앞에 두었더라면 밤을 새우더라도 나로선 답을 내리지 못할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현수 양을 먼저 버스에 태워 보내고 주차장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시동을 걸 생각도 않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친구들과 후배들의 심심찮은 조언 요청이 있을 때면 항상 잘난 척 거드름을 피워가며 인생이란 말이야, 삶이란 말이지 이런 소리를 지껄이곤 했는데, 어제만큼은 그녀에게 어떠한 조언도 해 줄 수 없었다. 사실 그 이유도 잘 모르겠다. 잠시 덮었던 머릿속 도덕책을 도로 폈다면 그럴듯하게 달짝지근한 조언 몇 마디쯤은 충분히 입에 바를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조언이라도, 내가 한 말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은 꼭 져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것 같다.




늦은 시각에 스승님께 자문도 구하고 오늘 아침엔 황여사에게도 사연을 들려주며 도움을 청했다. 두 분의 말씀을 꼼꼼히 적어 두긴 했으나 이것이 과연 현수 양이 원하던, 아니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조언일지는 잘 모르겠다.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살아야지 라며 냉정하게 외면하지 않을 거라면, 이렇게 생각해 보고 저렇게 행동하면 어떨까 정도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해 줬어야 했는데, 속 시원한 조언 하나 제대로 생각해내지 못한 나 자신이 참 한심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정작 조언이 필요한 건 나였던 셈이다. 그녀에게 어떤 조언을 할지 지금의 내게 조언이 필요한 것이다.




* 편의상 '현수'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Image by JacksonDavid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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