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우야, 인자 일어나야제.”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찬우는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벽에 걸린 시계가 벌써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초저녁에 얼핏 선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얼른 세수하고, 옷도 갈아입어라.”
“예, 아버지.”
찬우는 마당으로 나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이 콸콸 쏟아졌다.
3월도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찬물에는 손이 시렸다.
얼굴을 닦고 제 방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찬우가 안방으로 건너왔다. 아버지는 그새 상을 다 차려 놓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 언제 이 상을 다 차리셨어예? 내를 깨우지 그랬습니꺼?”
“니가 할 게 머 있노? 밥과 국만 내가 하고, 나머지는 시장에서 사 온 거 그냥 그릇에 옮겨 담기만 하면 되는데. 머, 어데 하루 이틀 하나?”
상 위에는 하얀 쌀밥과 탕국, 구운 조기 한 마리, 사과, 배, 부침개, 그리고 떡이 담긴 접시들이 가지런히 차려졌다.
아버지는 찬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책상 서랍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서 엎드렸다.
“고(故), 김, 미, 정. 이만하면 내도 글씨 예쁘게 잘 쓰제? 아빠 별명이 강석봉 아이가, 강석봉.”
아버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찬우는 옷장을 열고 그 속에서 하얀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보자기를 받아 든 아버지가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그러자 환하게 웃고 있는 찬우 엄마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가 나왔다.
“미정 씨, 그동안 잘 있었소? 허허허.”
아버지는 하얀 천으로 액자를 깨끗이 닦아 상 위에 조심스럽게 세웠다. 찬우는 손을 모으고 아버지 옆에 섰다.
아버지가 초에 불을 붙이고 향을 피웠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매캐한 향 냄새가 방에 가득 찼다.
“미정 씨, 술 한 잔 하소. 그라고 우리 찬우 절도 받고.”
찬우는 아버지가 들고 있는 잔에 청주를 가득 부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향 위에서 세 번 돌린 다음 엄마의 사진 앞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찬우는 아버지가 일어서기를 기다려 정성스럽게 절을 두 번 했다.
“내 절도 한 번 받을라요?”
이번에는 찬우가 무릎을 꿇고 잔을 받아 상 위에 올리고 아버지가 절을 했다.
절을 마친 아버지가 젓가락을 상 위에 탁탁 두 번 치고는 그것을 조기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 좋아하는 조기요. 많이 잡수소.”
3월 6일. 오늘은 찬우 엄마의 제삿날이다.
찬우는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찬우의 어머니는 남해의 한 병원에서 찬우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치른 뒤 찬우가 제 발로 걷기 시작했을 즈음에 아버지는 세간을 정리하고 짐을 꾸려서 찬우를 데리고 부산으로 왔다.
친구들의 어머니를 볼 때면 가끔 엄마가 그립기도 했고, 때로는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찬우는 아버지에게 그것을 대 놓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술에 살짝 취한 아버지가 가끔 혼자서 엄마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어깨너머로 듣거나 엄마 생각이 날 때마다 옷장 속에 있는 보자기를 꺼내 사진을 보면서 그저 ‘엄마’ 하고 불러 보는 게 전부였다.
“미정 씨, 우리 찬우 많이 컸지요? 당신 손잡아 본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네요. 거기는 어떻게, 지낼 만 한교? 인자 곧 봄인데. 우리는 머, 이렇게 잘 살고 있소. 찬우도 공부 열심히 하고, 내도 일 열심히 해서 돈도 잘 벌고 있소. 근데 갈수록 힘이 드네요. 남자 혼자 애 키울라 하니까 힘에도 부치고, 찬우가 말은 안 해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 같고……”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하다가 찬우 아버지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아이고, 내가 지금 무신 소리 하고 있노? 여보, 미정 씨. 오늘 많이 잡숬고 날 좀 풀리면 당신 보러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소.”
상 위에 부어 놓은 술을 한 잔 마시면서 아버지는 마치 엄마를 앞에 두고 말하는 듯 사진을 보며 이리저리 시선을 맞추었다.
해마다 엄마의 제삿날이면, 아버지는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면서, 당신을 보러 간다, 봄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아버지 혼자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찬우를 데려가거나 엄마의 산소에 다녀왔다는 말을, 찬우에게 한 적은 없었다.
찬우는 웃고 있는 아버지와 사진 속의 엄마를 번갈아 보았다. 엄마도 찬우를 보며 아버지처럼 웃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이 난 듯,
“아 참, 찬우야, 제사는 이걸로 끝이고.”
하며 방구석에 있던 상자를 상 위로 올렸다.
“아버지, 이게 먼데요?”
“임마야, 제사는 제사고, 니 생일은 생일 아이가. 짜슥이 알면서 능청 떠는 거 봐라.”
아버지가 찬우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그랬다. 찬우를 낳다가 엄마가 세상을 떠난 것이어서 찬우의 생일은 항상 엄마의 제삿날과 같았다. 엄마의 제삿날이라 슬퍼해야 할지 자신의 생일이라 기뻐해야 할지, 찬우는 매번 헷갈렸다. 그리고 엄마의 제사를 마치고 그 상 위에 생일 케이크를 올려 두면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 때문에 마치 오늘이 엄마의 생일인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아버지가 케이크 위에 열한 개의 양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니 생일인데 니가 축하 노래를 직접 부를 수는 없고 에헴. 아빠가 오래간만에 목청 한 번 뽑아 볼까? 아아, 마이크 시험 중.”
아버지는 숟가락을 세워 들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노래를 불렀다.
“새앵일 추욱하아 하압니다아. 새앵일 축하 하압니이다아. 사아랑하아는 우리 차안우, 새앵일 축하하압니다.”
노래를 마친 아버지가 크게 박수를 쳤다. 찬우는 아버지의 노래를 듣고 따라서 박수를 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와 웃노? 별로가? 땡이가? 이번에는 좀 잘 부른 것 같았는데, 아이가? 다시 부르까?”
“아닙니더, 아버지. 근데 내는 한마디 말도 안 하고 가만있고, 아버지 혼자 양초 꽂고, 불 붙이고, 노래하고, 손뼉 치고, 내는 아직 소원도 못 빌었는데예?”
“아, 맞다.”
하며 아버지가 이마를 탁 쳤다.
“우짜꼬? 다시 하까?”
아버지는 다시 케이크에 불을 붙일 기세였다.
“아입니더. 농담이라예.”
아버지가 멋쩍은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그라고 이거 갖고 니 묵고 싶은 거 사 묵어라, 친구들하고. 알겠제?”
“예, 아버지.”
찬우는 그런 아버지가 좋았다.
“찬우야,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니는 이거 명희 할매 좀 갖다 드리라.”
상을 치운 다음, 방에서 이어진 부엌문을 열고 아버지가 제사 음식이 담긴 봉지를 찬우에게 건넸다.
“명희 할매한테요? 알겠습니더. 빨리 갖다 올 게예.”
“오야.”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 모두에게 친절했는데 특히 명희 할머니에게는 유독 신경을 더 쓰는 것 같았다. 아버지 말로는 명희 할머니가 남해에 있는 찬우의 할머니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찬우는 남해 할머니를 고작 한 두어 번 봤을 뿐이라서 두 사람이 그렇게 닮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계속]
* Image by manseok Kim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