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 이거 맛있어요?”
“아이고, 우리 예쁜 수아 왔나? 머 주꼬?”
“이거요. 그리고 저것도 조금 주세요.”
“그래, 어데 보자. 사과하고 복숭아하고. 사과는 조금 시데이.”
“우리 엄마는 그런 거 좋아하셔요. 얼마예요?”
“보자, 이천 원만 주고 가라. 아줌마가 특별히 니니까 조금 깎아준 거데이.”
“고맙습니다.”
“아이고, 우리 수아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꼬? 나중에 니는 꼭 이 아줌마 며느리 해라, 알겠제?”
네, 하고 웃으면서 셈을 치른 다음, 수아는 과일 봉지를 받아 들고 종종걸음을 했다.
원래는 학교에서 특별 활동을 하는 날이었는데, 선생님이 교육청에 급히 갈 일이 생겨 다음 주로 미뤄졌기 때문에, 오늘은 오랜만에 엄마의 가게에서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아는 한 손으로 과일 봉지를 받쳐 들고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려 길을 건너 엄마의 양장점으로 들어갔다.
“엄마.”
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소리를 냈다.
“응, 수아 왔니? 그게 뭐야?”
수아 어머니가 옷감을 만지다 말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수아는 웃으면서 봉지에서 사과와 복숭아 하나씩을 꺼내어 짠, 하고 볼에 갔다 대었다.
“에구, 그거 맨 살에 대면 가려울 텐데, 내려놓으렴. 엄마가 나중에 씻어 줄게. 근데 무슨 과일을 그렇게 많이 샀니? 어디서 샀어?”
“응, 저 길 건너 딸 부잣집 과일 가게. 그 아줌마는 오늘도 나보고 며느리 하제. 아들도 없으면서, 웃긴다, 그지?”
수아는 복숭아를 도로 내려놓고 사과를 손으로 쓱쓱 닦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하고 소리가 났다.
“에그, 씻지도 않고.”
“괜찮아.”
“달아?”
“아니, 시어. 가게 아줌마가 아직 단맛이 없을 거라고 그랬어.”
“참, 너는 어쩜 그렇게 아빠를 닮았니? 아빠도 풋사과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몰라.”
“내가 아빠를 닮았나 보지, 뭐.”
“그럼, 우리 수아는 아빠를 꼭 빼닮았지. 아빠가 살아 계셨으면 우리 수아를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흠, 엄마 또 아빠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 오늘은 안 바쁜가 보네?”
수아 어머니는 손질하던 옷감을 내려놓으며 빙긋이 웃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빠 생각, 안 바빠도 아빠 생각 하지요, 공주님?”
“엄마가 아빠 생각을 전부 다해 버리니까 내가 아빠 생각할 틈이 없, 지, 요, 헤헤.”
“아이구, 그러세요? 요새 연애하신다고 그러는 게 아니구요?”
“엄마는 참. 연애는 무슨.”
하지만 수아는 그런 엄마의 농담이 싫지 않았다.
수아 어머니는 다시 재봉틀 앞에 앉았다. 손잡이를 돌리려다 말고 수아 어머니가 물었다.
“그래, 요새 그 친구하고는 잘 지내니?”
“누구?”
“엄마가 직접 이름을 말해야 될 만큼 수아가 잘 모르는 사람일까?”
“글쎄, 누구지?”
수아가 짐짓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찬우!’
“딩동댕. 하하하.”
수아가 환하게 웃었다.
“넌 어째 찬우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표정이 밝아지니?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찬우가 어디가 좋은데?”
“음……남자답고, 싸움도 잘하고, 친구들도 잘 챙겨주고, 그만하면 잘 생겼고, 음, 근데 공부는 쪼금, 별로야. 집에 동아전과가 없어서 그런가?”
“녀석.”
“찬우도 너 좋아하니?”
“몰라. 그런데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면서 왜 몰라?”
“아직까지는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은 안 했어.”
“너는, 너는 먼저 했어?”
“응, 말도 했어.”
“말도? 말도? 또 다른 건, 그럼?”
“응, 뽀뽀도 해 줬어, 내가. 그때 생일날 우리 집 앞에서.”
“해 준 거야? 한 거야?”
“그냥 내가 했어. 걔는 눈을 꼭 감고 덜덜 떨고 있더라구.”
“정말? 와, 우리 수아 용감한데? 하긴 엄마도 아빠한테 먼저 뽀뽀를 했었지.”
“근데 뽀뽀도 하고 말도 했는데 왜 반응이 없을까?”
“글쎄, 왜 그럴까?”
“그냥 내가 찬우한테 가서 나 좋아하냐고 물어볼까?”
“그럼 찬우가 겁을 내서 더 달아나지 않을까?”
“음, 친구들이 곤란할 때 챙기는 거 보면 기본적인 배짱은 있는 것 같던데.”
“엄마 생각엔……그냥 찬우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 아닐까?”
“엄마, 찬우는 나랑 동갑이야. 둘 다 열한 살이라구.”
“수아야, 남자는 여자보다 좀 느려. 그런 데서는.”
“……”
“그리고, 찬우는 엄마가 없으니까 더 그렇지 않을까?”
그 말에 수아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 엄마. 엄마가 찬우 엄마 안 계신 걸 어떻게 알아?”
“으, 으응. 그, 그냥 들었어. 그때 네가 이야기하지 않았니?”
“그랬나?”
수아는 갑자기 당황스러워하는 엄마가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건 그렇고, 그래도 느낌, 이런 걸로 알 수 있지 않을까? 나이가 어리다고 못 느끼는 건 아닐 텐데.”
“휴, 글쎄.”
수아 어머니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매일 아침 찬우를 볼 때마다 내가 텔레파시를 보내거든. 나, 너 좋아한다. 나, 너 좋아한다. 이러면서.”
“텔레파시?”
“응, 텔레파시. 그것도 아주 강하게.”
“방해 전파가 있겠지.”
“방해 전파?”
수아는 그 대목에서 말을 멈추고, 엄마가 말한 방해 전파가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 모습으로 보고 수아 어머니가 틀림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 엄마 말이 맞지? 방해 전파가 있는 거지?”
“응, 확실히 그런 게 있네. 확실히.”
수아는 머릿속에 떠오른 누군가의 얼굴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수아를 보면서 수아 어머니는 조심스러운 걱정이 들었다.
“근데 수아야.”
“응, 엄마.”
“어릴 때 우정은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도 있어.”
“알아, 엄마. 나 찬우랑 나중에 결혼한다거나 이런 생각은 안 해. 나 이제 겨우 열한 살인 걸? 그냥 지금 좋아할 뿐이야, 지금. 대신, 나중에 커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좋으면, 그리고 찬우도 나를 좋아하면, 찬우가 내 신랑이 될지도 모르지만. 엄마, 그런 건 걱정 마, 헤헤.”
수아가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어쨌든 우리 수아 다 컸네. 엄마한테 남자 친구 이야기도 다 하고. 이제 엄마는 혼자 살아도 되겠다.”
“쳇, 저래 놓고 나중에 나 시집간다 하면 펑펑 울 거면서?”
“누가 운대? 엄마가?”
“백 프로 울 걸? 내기할까?”
“좋아. 내기하자. 무슨 내기?”
“음, 이런 내기, 진 사람이 뽀뽀 백 번 해 주기.”
하고는 수아가 갑자기 수아 어머니의 품에 달려들면서 볼에 뽀뽀를 연신 해댔다. 아유, 얘가, 하면서도 수아 어머니는 수아를 꼬옥 끌어안았다.
“엄마, 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아빠 생각 그만하고.”
“그래.”
“그리고 엄마. 엄마는 지금도 젊고 예뻐. 정말 좋은 사람 있으면 데이트도 하고, 연애도 해. 그리고 엄마가 좋다면 그다음도 나는 괜찮아.”
“그다음이라니?”
“뭐긴 뭐야? 결혼하는 거지. 나도 언제까지 엄마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 아빠 소리도 하면서 학교 다녀야지. 운동회 때 아빠하고 달리기가 나오면 얼마나 당황스러운데.”
“우리 수아 다 컸네.”
“대신 엄마 혼자 미리 결정하지 말고, 그런 아저씨가 생기면 나한테 먼저 검사를 받도록, 알겠지?”
“그래, 수아야. 그렇게 할게. 정말 넌 엄마의 가장 큰 힘이야. 엄마도 너하고 평생 살 거야.”
“싫어. 나 시집갈 때까지만 같이 살아.”
“그래, 알았어.”
수아 어머니는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 맡아도 좋은 엄마의 냄새를 느끼면서 수아는 이대로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식사하이소.”
“어, 그래. 벌써 다 했나?”
찬우가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찬우 아버지가 보던 신문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상을 받았다.
“새로 한 건 아이고 어제 묵던 거, 새로 뎁혔습니더.”
“그래도 맛은 좋더라.”
하며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캬아. 이 맛이다.”
“괘않습니꺼?”
“니는, 내가 아는, 그라고 내가 가 본 식당 중에 최고의 요리사다.”
찬우는 아버지의 그런 칭찬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찬우야, 이거는 없나?”
찬우 아버지가 술잔을 꺾는 손짓을 했다. 찬우는 웃으면서,
“다 준비했다 아입니꺼.”
하고는 부엌문 옆에 두었던 소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야, 역시 내 아들, 강찬우, 최고다, 최고.”
찬우가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아버지는 그것을 참 맛나게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찌개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아버지, 술만 드시지 말고 식사도 하셔야지예.”
“그래, 같이 묵자.”
아버지와 찬우는 한참을 조용히 식사를 했다. 식사를 다 마쳐갈 때쯤,
“니는 요새 걱정거리 없나?”
하고 아버지가 물었다.
“걱정거리예? 음, 아, 있습니더.”
“어, 그래? 먼데?”
“박명희가 좀 이상합니더.”
“박명희? 명희 할매 손주, 너그 반 명희?”
“예.”
“가가 와?”
“모르겠습니더. 이유도 없이 화를 내고, 내가 지 말고 다른 여자 애들하고 있는 꼴을 못 봅니더. 그냥 청소를 도와준 건데, 와서 머라 머라 하믄서 소리를 지르고 울고 가지를 않나.”
“울어?”
“예, 엉엉 울고 갔습니더.”
“야, 답 나왔다. 찬우야.”
찬우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거는 명희가 니를 좋아하는 거다.”
“예, 저도 압니더. 아버지.”
“에라이, 자슥아, 잘난 체 하기는.”
허탈해진 아버지가 웃으며 찬우의 볼을 쥐고 흔들었다.
“맨날 내를 좋아한다고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닙니더.”
“그래서, 니는 명희가 싫나?”
“싫은 건 아닌데, 그런데 친구끼리 싫고 좋고가 어딨습니꺼? 전부 얼라들인데.”
“와, 우리 찬우가 제법 어른 같은 소리 하네?”
“도통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명희가 아무한테나 그라더나?”
“아니예. 화영이나 성미, 하다못해 현광이나 병철이, 이런 애들한테는 진짜 친절하게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수아한테만큼은 정말 장난이 아닙니더.”
“수아? 수아가 누군데?”
“저 길 건너에 엄마하고 둘이 사는 서울에서 전학 온 애 있다 아입니꺼?”
“양장점 수아 말이가?”
“어? 아버지. 아버지는 수아 엄마가 양장점 하는 거, 우째 압니꺼? 나도 얼마 전에 처음 가 봤는데.”
찬우 아버지는 순간 당황했다.
“아, 아니다. 니가 그때 내한테 말 안 했나? 너그 반에 공주 같은 애 있다꼬.”
“그런 말 안 했는데예. 오늘 처음입니더.”
“하여튼 그래서 우쨌는데?”
찬우 아버지는 애써 다음 말을 끌어당겼다.
“예. 어제 명희가 하도 지랄을 해 갖꼬.”
“지랄? 그런 말 하믄 못 쓴다, 임마.”
“아, 예. 아버지. 잘못했습니더. 하여튼 어제 명희가, 내가 수아 청소하는 걸 도와줬다꼬 난리를 부려서, 말도 마이소.”
“명희가 니를 엄청 좋아하는갑다.’
“우짜믄 좋겠습니꺼?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던데.”
“다, 시간이 해결해 줄 끼다. 어쨌거나 우리 아들 직이네. 여자들이 니 땜에 울고불고 하니 말이다.”
“다 아버지 닮아서 그렇다면서예.”
“그래, 나도 한 때는 이름 좀 날렸제. 나도 왕년에.”
하려는데,
“아버지, 국 다 식습니더. 빨리 드이소.”
하고 찬우가 냄비를 밀었다.
“이 자슥이, 지만 잘난 체하고.”
찬우 아버지가 다시 또 찬우의 볼을 쥐고 흔들었다.
잠든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수아 어머니는 수아가 했던 말이 계속 귓전에 맴돌았다.
‘찬우 엄마가 안 계신 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내가 말했었나?’
아버지는 찬우가 설거지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마루 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아주 천천히 내뱉었다. 하얀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버지, 수아 엄마가 양장점 하는 거 우째 압니꺼? 나도 어제 처음 가 봤는데.’
찬우의 말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찬우 아버지는 자신의 다리에 난 깊은 상처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