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우야아, 찬우야아.”
오랜만에 아버지와 일요일 등산을 다녀와 이른 점심을 먹고 있는데 찬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렸다.
“현광이 왔는갑네.”
찬우 아버지가 물을 마시고 입을 헹구면서 말했다. 찬우는 마루 끝으로 가서,
“무슨 일이고? 내 밥 묵는다.”
라고 크게 말했다.
“친구가 부르는데 얼른 나가서 문을 열어 주야지, 그라믄 되나?”
아버지가 찬우를 나무랐다. 조금은 멋쩍어진 찬우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대문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고? 일요일인데 늦잠이나 자지.”
대문 밖에는 아섭이와 현광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서 있었다.
“전자 오락하러 가자. 히히.”
“전자 오락? 야! 우리 지금 어버이날 선물 때문에 한 푼이라도 아껴야 되잖아. 근데 무슨 전자 오락?”
찬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몸에 밴 신문 잉크 냄새 때문에 아버지의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다.
“응, 걱정마라. 돈 안 드는 오락이 있다.”
아섭이가 싱글거렸다.
“현수가 놀러 오라 하더라. 자기 집에 오락하러 오라더라.”
“현수 집이 오락실 하나?”
“그기 아이고, 현수 아버지가 이번에 어린이날 된다꼬 게임기 미리 사 줐다 하더라. 그거 하러 놀러 오라 하더라.”
“게임기? 진짜로?”
찬우가 눈이 똥그래졌다.
“빨리 가자.”
“근데 나도 가도 되나? 오란 말도 안 했다 아이가.”
“아이다. 현수가 찬우 니는 오라 했다.”
“그래?”
“그런데 우리는 오라 안 했다. 그러니까 찬우 니가 가야 된다. 니가 가믄 우리는 그냥 니 따라 가믄 된다. 히히.”
찬우는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오라고 한 찬우는 미처 그 말을 듣지 못했는데, 오라는 말을 듣지 못한 아섭이와 현광이는 자기를 데리러 왔다? 내가 가면 자기들도 따라간다?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오라고 했으니까 일단 가 보자. 찬우는 아이들을 따라 나섰다.
띵띵 띠리리리리띵. 쵹쵹쵹. 삐용, 삐용, 뿅뿅, 뿅뿅뿅.
“와, 현수야. 이거 직인다. 진짜 오락실 거하고 똑같네.”
아섭이는 소형 게임기를 끼고 앉아 연신 신기하다는 듯 현수에게 감탄사를 날렸다.
“머 그까짓 거 갖꼬 그라노? 더 신기한 것도 많다. 저기 현광이가 하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는 기다.”
현수가 잔뜩 거드름을 피면서 현광이를 가리켰다.
“저건 먼데?”
“사파리 총이라고, 사냥할 때 쓰는 총하고 똑같이 만들었다. 총을 쏘면 총알은 나가고 탄피는 옆으로 튀어나온다.”
“탄피가 머꼬?”
아섭이가 머리를 긁었다.
“바보야, 총알 껍데기 말이다.”
“총 쏘면 다 나가는 기 아이고, 총알 껍데기가 따로 있나? 총알이 밀감처럼 껍데기가 따로 있는갑네?”
“이 무식한 녀석, 니는 인자 현수 집에 놀러 오지 마라. 창피하다.”
현광이가 장난감 사냥 총을 겨눠 아섭이에게 당겼다. 푸슝, 하는 소리와 함께 제법 큰 총알이 아섭이를 향해 발사되었고, 현수의 설명처럼 총알 껍데기, 탄피가 총의 몸통 옆으로 튀어 나갔다.
“와. 이거 직이네.”
현광이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현수가 그걸 보고 웃으며,
“근데 찬우야. 니는 머 하노?”
하고 찬우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왔다.
“으, 으응? 나는 그냥 책 본다. 현수 니는 참 좋겠다. 책이 많아서.”
“울 엄마가 책은 엄청 사놨다. 근데 그라믄 머 하노? 재미가 하나도 없는데. 그냥 만화책이나 좀 사 주지.”
“그래도 이런 책이 우리한테는 좋다. 하여튼 니가 부럽다. 책이 많아서.”
찬우는 현수의 책장에서 이런저런 책을 뽑아 보며 말했다. 그때, 현수의 방문이 열렸다.
“너그들, 머 하노?”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현수 어머니였다.
“아, 안녕하십니꺼? 현수 친구들인데예.”
현광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현수 어머니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현수야, 니가 야들 불렀나?”
하고 야단치듯 말했다. 현수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친구들이 집에 왔으면 같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어야지. 이기 머 하는 짓들이고?”
갑작스러운 현수 어머니의 야단에 아이들은 얼어붙은 듯 주눅이 들었다.
“야, 니는 누고?”
“예? 아, 예, 저는 장현광입니다. 현수 친군데요.”
“니는 지난번 월례 고사, 평균 몇 점 받았노?”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현광이가 당황했다.
“예? 평균예?”
“그래, 삼월 달에 국, 산, 사, 자 시험 쳤잖아. 음, 미, 도 빼고. 그거 말이다.”
“치, 칠십오 점인가, 받았는데예.”
현광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현수 어머니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는 이번엔 찬우를 바라보았다.
“야, 니는 누고?”
“강찬웁니더.”
“이름은 됐고, 니는 몇 점 받았노?”
“파, 팔십구 점 받았습니다.”
“그래? 팔십구 점? 야! 니는?”
아섭이가 눈이 똥그래져서 벌떡 일어섰다.
“니는 몇 점이고?”
“저, 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예.”
“어지간히도 못 했나 보네. 기억조차 안 날 정도면.”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현수가 버럭 짜증을 냈다.
“엄마, 와 그라는데? 애들 내랑 놀러 온 건데. 진짜로 엄마 짜증 난다.”
그러는 현수에게 현수 어머니는 오히려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이 녀석아, 엄마가 몇 번이나 말했노? 니보다 공부 잘하는 애들하고 놀아라고. 근데 이기 머꼬? 칠십몇 점? 어이가 없어서.”
현수 어머니는 현광이가 가지고 있던 총과 아섭이가 끼고 있던 오락기를 빼앗았다. 그러고도 성이 안 찼는지 꽤나 높은 음정의 목소리를 냈다.
“야, 책 보는 니, 팔십구 점, 니는 현수랑 놀고 너그 둘이는 가라. 집에 가서 공부해라. 다음 달에 시험 쳐서 팔십팔 점 이상 받으면 그때는 놀러 와도 된다. 알겠나? 빨리 가라.”
“엄마, 와 그라노?”
현수는 거의 울상이 되었지만 막무가내인 어머니를 어쩔 수가 없었다.
“아, 안녕히 계시소. 현수야, 우, 우리 간다.”
현광이와 아섭이가 어색한 인사를 하며 뒷걸음질로 문을 열고 나갔다.
찬우도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현, 현수야. 나도 가께. 나중에 놀자. 간데이. 아줌마, 안녕히 계시소.”
그러자 현수 어머니가 찬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팔십구 점. 니는 놀아도 된다 했는데 와 가노? 아이고, 꼴에 친구라고. 알았다. 가라. 다 가서, 여얼씸히 공부해서 우리 현수보다 시험 잘 치믄, 그 시험지 들고 그때 놀러 온나, 알겠제?
문이 꽝 소리를 내며 등 뒤에서 닫혔다. 방 안에서 찰싹, 하는 소리에 이어 으앙, 하는 현수의 울음이 들렸다.
“현광아.”
“응?”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나?”
현광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섭이의 팔을 툭툭 쳤다.
“아섭아.”
“왜?”
“니 평균, 육십사 점인 거 내 다 안다. 아까 확 말해 뿔라 하다가 참았다.”
“현광아.”
“응?”
“죽고 싶나?”
“그래, 차라리 오늘 같은 날은 확, 죽고 싶다.”
우물터 계단에 나란히 앉은 아섭이와 현광이는 서로를 쳐다보지는 않고 줄곧 앞산만 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뒤늦게 병철이가 나왔다. 한참 동안 이어진 아섭이의 하소연을 들은 병철이는 갑자기 현광이에게로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그럴 줄 알고 나는 일부러 현수 집에 안 갔다. 나는 오십칠 점. ”
셋은 놀이터 계단에 발라당 뒤로 누워 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찬우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현수 엄마는 옛날부터 그랬다. 현수랑 우리가 작년에도 같은 반 했었는데 여태 우리 이름도, 얼굴도 하나도 기억 못 하고, 현수 친구들이 집에 오면 그때마다 시험 점수 물어보고, 점수 안 좋고 공부 못 하는 애들은 집으로 가라 했다 하더라. 현수 엄마, 독하고 무서운 거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 원래부터 애들을 싫어한다 하더라.”
현광이가 눈이 부신지 눈을 감고 말했다.
“그래서 시험 잘 친 찬우만 놀러 오라 했던 거가?”
“그라모 현수가 반에서 일등 하면, 자기보다 공부 잘하는 애가 없어지는 거니까 결국 친구는 하나도 없겠네?”
“아하, 그래서 현수가 일부러 일등 안 하는 거가? 친구 없어질까 봐?”
아섭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 아섭이를 병철이가 다시 당겨 눕히면서 말했다.
“꼴찌가 있으니까 일등이 있는 거지. 혼자 있으면 그게 일등인지 꼴등인지 우째 아노? 맞제? 우리는 일등도 하지 말고, 꼴등도 하지 말고 늘 칠십팔 점만 받고 살자. 알겠나, 사랑하는 친구들아?”
병철이의 우렁찬 다짐에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네,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서로를 보며 또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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