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저거 복만이 아이가?”
머리에 묻은 모래를 털면서 아섭이가 말했다.
“맞네? 점마 머 할라꼬 오노? 우리 반 통들이 다 모여 있는데……오늘 점마 직이 뿔까?”
현광이가 설레발을 치며 찬우와 병철이를 돌아보았다. 찬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냥 웃어 주었다.
“너거, 내 손에 머가 있는지 아나?”
복만이가 이죽거리면서 다가왔다. 뒤로 감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는 눈치였다.
“하나도 안 궁금하다. 꺼지라, 임마. 퉤!”
현광이가 주먹 감자를 날리며 침을 뱉었다.
“그래? 현광이 니는 일단 통과.”
“먼데?”
그래도 궁금했는지 아섭이가 일어났다.
“짜잔!”
복만이가 뒤로 감추었던 것을 아이들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바나나였다.
“우와아, 그거 바나나 아이가?”
아섭이가 대번 복만이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니가 머 쫌 아네?”
“근데 웬 바나나고?”
아섭이가 복만이와 바나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벌써 입 속에는 침이 고인 듯했다.
“우리 삼촌이 사우디 갔다 오면서 사 온 거다.”
“사우디?”
“그래, 외국에 가서 돈 벌어 오면서 내 묵으라꼬 한 박스 사 왔다.”
“와. 직이네. 찬우야, 이거 봐라. 바나나다, 바나나.”
찬우는 계단에 앉은 채로 복만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현광이가 손을 툴툴 털고 일어났다.
“겨우 그거 자랑하러 왔나?”
“머라꼬, 임마. 겨우?”
복만이가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임마. 겨우, 바나나 한 개 갖꼬 자랑하나? 더럽구로.”
“장현광, 그러는 니는 바나나 묵어 봤나?”
“그래, 임마. 여기서 바나나 안 묵어 본 사람도 있나?”
하며 현광이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현광이의 기대와는 달리 다들 바나나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섭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까지 했다.
이제야 의기양양해진 복만이가 배를 내밀며 말했다.
“그럼 바나나가 무슨 맛인지 말해 봐라, 임마.”
바나나가 현광이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현광이는 순간 당황했다.
“그, 그건, 그냥 바나나 맛이지, 임마.”
“으헤헤. 바나나 맛이란다. 못 묵어 봤는갑네, 으헤헤.”
우스워 죽겠다는 듯, 복만이는 배를 잡고 거드름을 피웠다.
“나, 나는 갈란다. 임마. 니나 많이 묵어라.”
현광이는 냉큼 돌아서서 뛰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현광아, 기다렸다가 한 입 묵고 가자아아아.”
아섭이의 목소리가 현광이의 뒤를 한참 따라왔다.
“아버지.”
오토바이를 닦고 있는 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현광이는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불렀다.
“와? 무슨 할 말 있나?”
“응, 아버지.”
“먼데? 말해 봐라.”
“아버지, 내 바나나 한 개만 사 도.”
“머? 바나나? 와, 묵고 싶나?”
현광이는 애써 귀여운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한테 하나 사 달라고 해라.”
“진짜로? 와, 아버지, 진짜제?”
“여보, 현광이 엄마.”
부엌에서 저녁 상을 차리던 현광이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아버지의 말을 잘랐다.
“야가 정신이 있나 없나? 밥때가 다 되었는데 바나나는 무슨……”
엄마의 시큰둥한 반응에 현광이는 속이 상했다.
“그기 아이고, 오늘 우물터에서 복만이가 바나나 한 개 갖고 얼마나 더럽게 자랑을 하던지, 친구들 앞에서 쪽 팔려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다. 엄마는 씨이.”
“아이고, 저 자슥, 말버릇 봐라. 여보, 현자 아버지, 갸 한 대만 때려 주이소, 예?”
현광이 엄마가 팔을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뛰어나올 듯이 말했다. 현광이 아버지는 대답 대신 허허 웃고 있었지만, 현광이는 잔뜩 심통이 올라 있는 대로 볼에 바람을 넣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나나 사 줄 때까지 밥 안 먹을 끼다.”
“현광아, 그라지 말고. 내일 엄마가 사 줄 거니까네, 남자가 함부로 삐지는 거 아이다. 알겠제? 당신, 내일 시장에서 바나나 좀 사다 주소.”
“안 됩니더. 버릇 나빠지구로. 그리고 그기, 한 개 돈이 얼만데. 현광아, 니 얻어맞기 전에 빨리 손 씻고 밥 묵으러 안 올래?”
아버지가 이번엔 현광이를 달랬다.
"그럼 현광아, 아버지가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바나나 많이 사 주께. 그럼 됐제?"
"싫다. 씨, 내일 사 준다꼬 빨리 약속해라, 지금."
현광이는 잔뜩 볼이 부은 채로 대문 기둥에 붙어 딱따구리를 하고 섰다. 아버지는 그런 현광이를 한참 보다가 방으로 들어갔고, 어머니도 밥상을 방으로 들인 다음 소리 나게 문을 탁 닫았다.
한참 후에 동생 현자가 빨간 내복 차림으로 쫄래쫄래 나왔다.
“오빠야, 니 진짜 밥 안 묵을 끼가?”
“그래, 안 묵는다.”
“응, 알겠다. 엄마가 오빠야 니 밥 버린다 하더라.”
“버리라 캐라.”
“알았다.”
현자는 혀를 쏙 내밀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결국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자, 현광이는 살금살금 방문 옆으로 다가갔다.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아버지는 고단한지 이미 잠이 들었고, 그 옆에서 어머니는 희미한 탁상 등을 켜고는 산더미처럼 쌓인 스웨터의 실밥을 다듬고 있었다.
현광이는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조용히 이불속으로 들어가 애써 잠을 청했다.
다음 날 현광이는 아침을 굶은 채 도시락도 놔두고 학교에 갔다.
“임마, 그런다고 도시락도 안 갖고 왔나?”
병철이가 도시락 뚜껑에 제 밥을 덜어 주면서 말했다.
“굶어봤자 니만 손해지, 아무리 바나나라 해도.”
아섭이도 그런 현광이를 놀렸다.
“그래, 너거는 어제 복만이한테 한 입 얻어 묵었나?”
“말도 마라. 복만이 그 자식, 그거 갖고 자랑하다가 바닥에 떨어뜨려서 울면서 집에 갔다.”
찬우가 젓가락을 나눠 주었다.
“그거 참 꼬시다.”
현광이는 혀를 날름거렸다. 그때였다.
“야, 장현광!"
화영이었다.
"선생님이 니 교무실에 오라신다.”
선생님이 왜 부르시는 걸까? 현광이는 아섭이를 쳐다보았다.
“빨리 가 봐라. 선생님이 니한테 바나나 한 개 주실 지도 모른다.”
아섭이가 벌써 도망갈 준비를 하면서 놀렸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현광아, 너 지금 빨리 대동 병원으로 가라.”
“예? 무슨 일입니꺼?”
“너희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셨단다. 조금 전에 너희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어. 선생님이 조퇴시켜 줄 테니까 택시 타고 빨리 가라. 대동 병원이 어딘지는 알지?”
선생님의 허락을 받은 찬우가 현광이의 가방을 챙겨 들고 따라나섰다. 지나가는 차가 없어 큰길까지 달려 나가서야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원, 휠체어에 앉은 환자와 가족들로 병원 안은 정신이 없었다.
찬우는 접수창구로 달려가서 현광이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주고 병실 번호를 받아 적었다.
“2층 1521호란다.”
찬우와 현광이가 헐레벌떡 2층으로 올라가니, 어항 앞에서 놀고 있는 현자의 모습이 보였다. 우연히 현광이를 본 현자가 냉큼 달려왔다.
“오빠야.”
“아버지, 어데 있는데?”
현자를 따라간 병실 입구에 장복태라고 적힌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 안으로 아버지가 보였다. 현광이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조심스레 들어갔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누워 있었다.
“아버지.”
“엉? 현광아, 니 우째 알고 왔노? 어, 찬우도 왔네?”
“안녕하십니꺼, 아저씨. 괘않습니꺼?”
찬우가 인사를 하면서 현광이 아버지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현광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우째 된 건데?”
“응, 아랫동네로 배달 가는데 골목에서 갑자기 트럭이 튀어나와서, 그거 피한다고 하다가 도랑으로 떨어졌다 아이가. 천만 다행이제, 차에 안 받힌 게.”
“다리가 이래 됐는데 무슨 천만 다행인교?”
옆에 있던 현광이 어머니가 버럭 화를 냈다.
“선생님이 아버지가 사고 나서 병원에 있다고 가라 하더라. 아버지, 괘않나?”
”그래, 내는 괘안타. 걱정 마라. 살짝 다쳤으니 며칠 있으면 집에 갈 수 있다.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가 현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현광이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찬우가 보기에도 살짝 다친 것은 절대 아닌 것 같았다.
“근데 니는 배 안 고프나? 어제도 굶고, 아침도 안 묵고, 아 참, 맞다. 현광아.”
“응, 아버지.”
현광이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대답을 했다.
“참, 니 이것 묵고 싶다고 했제?”
그러면서 현광이 아버지는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어 보이는 몸을 돌려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과일 바구니였다.
“이 안에 바나나 있더라.”
“……”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묵어라. 찬우도 한 개 주고. 큰 아버지가 사 온 거다. 현자야, 니도 하나 더 묵어라.”
”헤헤, 오빠야. 나는 벌써 두 개나 먹었다. 진짜 맛있다. 오빠야.”
현자가 옆에서 쫄랑거리며 바나나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현광이는 순간 화가 났다. 주먹으로 현자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 바람에 현자가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문디같은 가시나야. 니는 아버지가 아픈 것도 안 보이나? 바나나가 그렇게 좋나?”
현광이 어머니가 깜짝 놀라 현자를 끌어안았다.
“야가 와 이라노? 다른 분들도 계신데. 니, 참 못 됐다.”
어머니가 현광이를 나무랐다. 아버지도 거들었다.
“니 와 그라노? 동생한테 그러면 못 쓴데이. 현자가 무슨 잘못을 했노? 동생한테 그라지 마라. 그라고 이거 묵어라.”
현광이는 한 손에 바나나를 받아 들었다. 껍질을 깔 생각도 나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계속해서 목에 무언가가 차 올랐다. 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입술이 씰룩거렸다. 울어선 안 되는데 그놈의 눈물이 또 났다. 그렇게 원하던 바나나가 바구니 채로 있는데도 조금도 신이 나지 않았고, 복만이에게, 아섭이에게, 병철이에게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마저도 전혀 들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다쳤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금세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현광이는 한 손에 바나나를 들고 고개를 숙이고 울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현광이를 끌어당겨서 손으로 코를 닦아주고는 바나나 껍질을 벗겨서 여전히 울고 있는 현광이의 입에 조금씩 넣어 주었다.
현광이는 바나나를 씹지도 못하고 입 속에 넣은 채 울음을 멈추려고 계속 콜록거렸다. 바나나를 쥐고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웃는 얼굴로 현광이를 내려다보았다.
“현광아.”
병원 문을 나서면서 찬우가 불렀다.
“응?”
“바나나 묵어 보니까 어떻더노? 맛있더나?”
“아니.”
현광이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맛이더노?”
“그냥 떫고, 쓴 맛만 나더라.”
“그렇제? 나도 우리 엄마 제사 때 먹어 보니까 그런 맛이더라. 그런 게 뭐가 맛있다고 복만이가 그랬을까, 맞제?”
현광이는 눈물을 멈추고 찬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찬우가 웃으면서 현광이의 어깨를 툭 쳤다.
“인자 가자. 신문 배달할 시간 다 됐다. 빨리 택시 잡아라.”
현광이는 병원 건물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택시를 잡으러 큰길로 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