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희야.”
“응, 할매.”
“찬우 아버지한테 가서 내가 보잔다꼬 우리 집으로 좀 오라 해라.”
“누구?”
밀린 숙제를 하느라 개학 전날 밤을 꼬박 새웠던 지난해의 기억 때문에,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숙제부터 해버리겠다고 명희는 결심했다. 그래서 방학 이틀 째인 오늘도 명희는 하루 종일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숙제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찬우 말이다, 찬우. 니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찬우.”
명희 할머니가 명희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에이, 할매는 뭐라카노? 내가 언제 찬우, 하면 자다가 일어났노?”
“와, 내 말이 틀맀나?”
“치아라. 인자 그 머스마도 끝났다.”
명희는 뾰로통해져서 공책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하이고, 웃긴데이. 언제는 할매 없이는 살아도 찬우 없이는 못 산다꼬 노래를 불러쌌더만. 와, 먼 일 있나?”
“그거는, 할매는 몰라도 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명희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또 짜증이 났다.
‘여우 같은 가시나. 지금도 혹시 찬우랑 놀고 있는 거 아이가?’
“이 가시나, 말하는 거 봐라. 할매는 몰라도 된다니, 그기 먼 말이고? 저그 부모 대신에 내가 키아 주는데 그 은혜도 모리고 갈수록 못돼지네? 가시나 니는 할매가 죽으면 혼자 신나서 운동장에서 막춤을 출 년이다, 니는.”
“할매, 진짜 머라 하노?”
명희는 할머니가 죽는다는 말에 버럭 화를 냈다. 화제를 바꾸어야 했다.
“찬우 아버지는 머 할라꼬?”
“니는 알 거 없고, 갈래, 말래? 이 늙은 할매가 저 아랫길로 찬우 아버지 부르러 가다가, 엎어져서 데굴데굴 굴러서 도랑에 칵 처박혀 죽어도 니는 계속 숙제만 할 끼제?”
“에이. 알았다. 갔다 오께.”
명희는 입을 삐죽거리며 연필을 내려놓았다.
요즘 들어 할머니는 부쩍 기력이 약해졌다. 허리가 굽긴 했지만 웬만한 계단 즈음은 끄떡없이 오르내렸는데 요새는 낮은 마루도 오르기 힘들어할 때가 많았다. 그런 할머니를 찬우네 집까지 걸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 외에도, 말로는 찬우와 끝났다고 했지만 혹시나 찬우가 지금 그 여우 같은 가시나와 노닥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투덜거리면서도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 착하다. 니 돌아올 때까지는 할매 안 죽고 기다리께. 천천히 갔다 온나. 좀 오래 살아 보자.”
명희는 할머니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해가 떨어지면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집 앞에 돗자리를 깔고 더위를 피했다. 어떤 집은 아예 저녁 식사를 거기서 하기도 했다. 찬우네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길에 나앉아 수박으로 만든 화채 따위를 나눠 먹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예쁜 명희야, 어데 가노?”
배가 불룩하게 나온 세탁소 진복이 아버지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동네에서 제일 예쁘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명희가,
“찬우 집에예.”
하면서 일부러 예쁜 걸음걸이로 그 앞을 지나려 했다. 그런데,
“아이고, 다 큰 아가씨가 총각 집에 마실 가나? 여름에는 밤도 짧데이. 데이트 잘해라. 아니면 인자 방학했으니까 거기 가서 살아라. 히히히.”
하며 진복이 아버지가 다시 놀리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들도 낄낄대며 웃었다. 명희는 창피했다.
‘쳇, 남의 속도 모르는 배불뚝이 두꺼비.’
명희는 찬우네 집 앞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에 앉은 사람들 때문에 여기저기 쳐다보는 눈들이 많았다. 그래서 명희는 찬우를 부르는 대신 초인종을 눌렀다. 삐, 하는 소리가 났다.
“누군데?”
안에서 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나오는 인기척이 없자, 명희는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삐이이이.
“아이 참, 누고?”
이번엔 신발을 끌고 나오는 소리가 났다. 명희는 홱 돌아섰다. 문이 끼이익 하고 열렸다.
“어? 박명희. 니 웬일이고?”
찬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명희는 찬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여전히 뒤돌아 선 채로 말했다.
“우리 할매가 너그 아버지 오시라 하더라. 그렇게 전해라. 나는 간다.”
“야, 박명희. 잠시만. 머 땜에 그라는데? 우리 아버지는 지금 주무시는데?”
“몰라, 우리 할매가 오라고 했으니까. 나는 할 말 전했으니까. 알았다. 우리 할매한테 가서 너그 아버지 잔다꼬 못 온다 하께.”
명희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찬우는 그런 명희의 태도에 슬슬 짜증이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박명희, 니 요새 도대체 와 그라는데?”
명희가 그제야 고개를 홱 돌렸다.
“몰라서 묻나, 머스마야.”
“참말로 모르겠다. 박명희 니는 성질도 못됐고 말도 참 못됐게 하네?”
“머라꼬, 이 머스마야!”
찬우도 팔짱을 낀 채로 힘을 잔뜩 주고 받아섰다.
“머, 내가 틀린 말 했나? 늦은 밤에 남의 집에 와서는, 이게 무슨 말버릇이고?”
“아이고, 그라는 니는? 니는?”
“내가 멀?”
“서울내기한테 푹 빠져 갖꼬 똥오줌도 못 가리는 바보 삼룡이 주제에.”
“머라꼬, 이 가시나가!”
명희가 그럴수록 찬우도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를 했다.
“무슨 일이고?”
찬우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찬우 아버지가 눈을 비비며 찬우와 명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 명희 왔나?”
명희는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왔으면 집에 들어오지 여기서 머 하노? 찬우야, 나는 하도 니가 안 들어오길래, 니가 또 누구랑 싸우는 줄 알았다.”
“싸우는 거 맞는데예, 아버지.”
그러자 찬우 아버지가 찬우의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여자하고 싸우는 거는 남자가 아닌 기라.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찬우 아버지는 명희에게 눈을 찡긋거려 주었다. 명희는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아저씨예, 우리 할매가 지금 좀 보자 하시던데예.”
“응, 할매가? 내를? 머 땜에 그란다 하시더노?”
“그건 잘 모르겠어예.”
“오야, 알았다. 내 옷 갈아입고 바로 갈게. 밤에 심부름하느라 고생했다. 명희야.”
찬우 아버지는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들어갔다.
“머스마야, 니는 너그 아버지 반 만이라도 닮아라.”
“지금도 반 넘게 닮았다, 가시나야.”
찬우는 여전히 지지 않았다. 명희도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야, 강찬우!”
“남의 이름 고만 부르고, 빨리 말해라. 귀 안 먹었다.”
“지난 번에 내가 준 거 돌리도.”
“지난 번에 머? 니가 머 줐는데?”
“니 생일에 내가, 흔들어 샤프 줐잖아. 그거 돌리도.”
“가시나야, 그건 내 생일 선물이라꼬 니가 준 거잖아.”
“아이다. 내가 그때 잘못 준 거다. 도로 돌리도.”
명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길에 앉은 사람들이 그 소리에 하나 둘 이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찬우는 그만 하자 싶었다.
“기다리라. 갖다 줄게. 더러워서.”
“더러우니까 빨리 돌리도.”
명희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찬우가 집으로 들어가는데 찬우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고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명희 갔나?”
“몰라예.”
“몰라? 너거 와 그라노? 명희, 저기에 그대로 서 있네.”
찬우 아버지가 대문 쪽을 보면서 말했다.
“……”
“근데 니는 와 들어 오노?”
“머, 돌리줄 게 있어서예.”
“먼데? 전과 빌렸나?”
“……”
찬우는 아버지가 대문 밖으로 나가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서랍에서 명희가 준 샤프를 찾아 꺼냈다. 그리고는 아 참, 하면서 명희가 준 생일 카드도 집어 들었다.
“자, 여기 있다. 다 가져가라.”
찬우의 말에 화가 잔뜩 묻었다. 명희는 샤프와 카드를 받아 들고는, 샤프를 이리저리 보며 말했다.
“이거 한두 번 쓴 거 같은데?”
“가시나야, 샤프 심도 없는데 멀 쓰노? 가져가라. 더럽다.”
“더러운 거 머 하러 받았노?”
“내가 달라했나, 니가 주니까 할 수 없이 받은 거지.”
“됐다. 고마 하자.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다.”
“인자 방학했으니까 니 얼굴 안 보고 속 시원하다. 웃음이 절로 난다.”
하고 찬우가 손가락을 입에 걸어 양쪽으로 당겼다.
“누가 할 소리고? 근데 니는 우짜노? 다마네기 못 봐서. 중국집에라도 가야 되겠네?”
“웃기고 계시네. 인자 니 신경 안 쓰고 맨날 따로 볼 수 있어 좋아 죽겠다, 나는. 내일 수아랑 광안리 놀러 가기로 했다.”
“머, 머라꼬? 좋겠네? 다 알겠다, 머스마야. 너거끼리 잘 묵고 잘 살아라.”
명희는 홱 돌아서서 저만치 앞장서 가는 찬우 아버지를 따랐다.
밑도 끝도 없이 뜬금없는 소리만 하는 명희를 보니 찬우는 자꾸 화가 났다.
‘가시나야, 그러면 그럴수록 니는 점수를 더 잃는 기다. 알겠나?’
찬우 아버지가 명희네 마루 끝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어무이, 식사는 하셨습니꺼?”
찬우 아버지는 명희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명희 할머니를 보면 늘 남해에 있는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방에 누워 있던 명희 할머니는 인기척을 듣고 서둘러 일어났다.
“어, 찬우 애비 왔나?”
“무슨 일입니꺼?”
“저녁은 묵었나?”
“예, 오늘은 좀 일찍 퇴근을 해서. 어무이도 식사하셨습니꺼?”
“내가 인자 늙어 갖꼬 묵으나 안 묵으나 똑같다 아이가.”
“그래도 끼니는 잘 챙겨 드셔야 오래오래 삽니더.”
“맞나? 그래, 그건 그렇고. 다름이 아니고, 찬우 애비야. 내 말 좀 들어 봐라.”
“예.”
명희 할머니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우리가 한 동네 산 지도 십 년이 넘었다 아이가. 그라다 보이 자네도 내 아들 같고 찬우도 내 손주 같은 생각이 드는 기, 어제오늘이 아인 기라. 자네는 내 맘 알제?”
“잘 알지예, 어무이.”
“내가 주욱 지켜보이, 그래도 찬우 애비 니만한 사람이 없다.”
“대체 무신 말씀입니꺼, 어무이?”
찬우 아버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명희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저 위에 사는 욱길이 할매가 좋은 처자가 있다꼬 내보고 중매 좀 서라 카는데.”
“중매예? 결혼 말입니꺼?”
찬우 아버지가 놀란 얼굴로 명희 할머니를 보았다.
“그래, 아들내미 데리고 혼자서 십 년 살았으면 먼저 간 애기 엄마한테도 자네가 할 도리는 다 한 기다. 그라고 찬우도 명희 맨쿠로 열한 살 아이가. 더 크기 전에 엄마의 정이라는 걸 느끼게 해 주야지, 안 글나? 명희야 머, 지 부모가 있으니까 찬우하고는 좀 다르겠지만서도 말이다.”
“……”
“사람도 좋고 괘안타 소문이 나니까 찬우 애비 니한테 여기저기서 중신 좀 넣어 달라 했는데 이때까지는 내 맘에 드는 여자가 없었던 기라.”
“어무이, 아무리 그래도 저는 결혼도 한 번 했고, 또 열 살이 넘은 아들까지 있는데 누가 저한테 시집을 오겠다 하겠습니까? 어떤 멀쩡한 처녀가……”
“야이, 도둑놈아. 니가 지금 처녀장가갈 생각을 했더나, 으이구.”
“아, 아입니꺼?”
찬우 아버지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었다. 명희 할머니도 웃었다.
“하기사 처녀라 캐도 찬우 애비 니가 꿇릴 건 없제, 암. 욱길이 할매 말로는 찬우 애비 니하고 비슷한 형편이라 하더라. 그 집도 바깥양반 하고 사별하고, 딸내미가 하나 있다 하더만. 올해 서른여덟이라 했나, 아홉이라 했나? 내가 기억력이 나빠서. 머, 대충 찬우 애비 니하고 서너 살 차이가 난다 하더라. 그 정도면 미혼이나 다름없다. 원래 고향은 서울인데 부산 내려온 지는 오래됐다. 집은 이 근처라 하데. 나도 아직 만나 보지는 못했다.”
“저같이 불쌍한 사람이 또 하나 있네예.”
“불쌍하긴 머가 불쌍하노? 그게 다 사람 인연인 거라. 딴말 말고 한 번 만나 봐라.”
“어무이. 말씀은 고맙지만예.”
찬우 아버지가 말을 잠시 멈추었다. 명희 할머니가 찬우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무이, 저는 만나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더.”
“머라, 그기 진짜가? 누군데?”
명희 할머니가 반갑다는 듯 찬우 아버지를 재촉했다.
“아직 말씀은 못 드리고예. 어무이 말씀하신 분하고 비슷한 상황인데, 저하고 비슷하게, 애가 딸린 처자가 하나 있습니더. 그런데 서로가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한 거는 아이라서. 또 저도 아직 찬우한테 이야기도 안 했고……”
“누군데?”
“직장 선배 여동생입니더.”
“진짠갑네? 중매 선다 해도 이름조차 안 물어보는 거 보니.”
“그라고 어무이, 별로 서둘고 싶지도 않습니더. 사람 만나는 거는. 인연이 아니면 사람 뜻대로 안 되는 거 아입니꺼.”
“하긴 그건 자네 말이 맞다.”
“우짭니꺼? 어무이가 지를 좋게 보셔서 중매도 서 주실라 하는데, 못난 놈이 그 뜻을 못 따라서예.”
“무신 소리고? 평양 감사도 지 싫으면 그만이라 안 카더나. 무조건 안 만나는 기 아이고. 자네가 다른 사람이 있다 하니 그게 더 낫제. 나는 그런 것도 모리고.”
“죄송합니더. 제가 부족해서 어디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못한다 아입니꺼.”
“아이다. 하긴, 그러면 그렇지, 찬우 애비 같은 사람이 어데 흔하나? 잘 됐다. 그라믄 내, 그 집한테는 다른 데 알아보라 하께.”
“저도 주위에 혼자된 사람 있으면 함 알아 보겠습니더.”
“그래, 그래 보자. 고만 가거라. 가서 쉬라.”
“예, 어무이. 고맙습니더. 그리고 죄송합니더.”
명희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찬우 아버지도 갑자기 창피한 생각이 들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할머니와 찬우 아버지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명희는 돌아누워 자는 체를 하고 있었다. 돌려받은 샤프를 만지작거리며 누워 있는데, 얼핏 들려오는 찬우 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에 명희는 자꾸만 귀가 쏠렸다.
‘할매가 말한 사람이 누구지? 여자 애가 하나 있는 서울내기? 혹시, 설마?’
명희는 할머니를 꼬드겨 어떻게든 그것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명희 할머니는 비밀을 털어놓으면 할매는 벌 받아 죽는다며 끝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