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혼란

by 진우


“자, 이거 묵어라.”

구청 마당 한 편의 벤치 앞에서 보선이가 사이다를 건넸다. 병철이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임마, 훔친 거 아이다. 내 돈 주고 산 거다. 빨리 묵어라.”

보선이가 이를 하얗게 드러내고 웃었다. 찬우도 뚜껑을 딴 다음, 한 병을 보선이에게 주었다. 하지만 보선이는 손을 내저었다.

“아이다. 나는 사이다를 먹기만 하면 배탈이 난다. 너거 묵어라.”

찬우와 병철이는 서로를 잠시 쳐다보다가 보선이의 재촉에 한 모금을 겨우 마시고는 옆에 내려놓았다. 트림이 나왔다.

“그런데 너거, 여기는 우짠 일이고?”

“보선아, 니 김명숙 선생님 알제? 선생님 심부름 왔다 아이가.”

트림이 코로 올라오는지 병철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선생님도 잘 계시제?”

“응. 그런데 보선아, 니야말로 여기서 머 하노?”

“머 하긴 임마. 구두 닦는다 아이가? 보면 모르나?”

보선이가 여태 손에 들고 있던 구두를 흔들어 보였다. 찬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보선아.”

“와?”

“그라모 니는 학교는 완전히 그만둔 거가? 우리는 니가 전학 갔다고 들었는데……”

잠시 망설이던 보선이는 이내 찬우를 보며 밝은 얼굴이 되었다.

“응, 적당한 핑계가 없어서 전학 간다고 했는데 학교는 그냥 그만둤다. 너거도 알다시피 내가 학교 다닐 형편이 안 됐다 아이가?”

“그라모 지금은 어데서 사노? 길에서 자는 거 아이가?”

걱정 어린 눈으로 병철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임마, 내가 거지가? 하하하하. 웃기는 놈이네, 하하하하. 잠을 자는 숙소가 따로 있다. 길 건너 명륜동에 행님들하고 같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밥도 거기서 다 묵는다. 점심은 머, 밖에서 사 묵고.”

“행님들이라면 혹시?”

“아하? 창수하고 택기? 하하하하. 걱정 마라, 아이다. 내한테 구두 닦는 거 가르쳐 준 형님들이다. 낮에는 다 같이 구두 닦고 밤에는 야간 학교 다니는 좋은 행님들이다. 그 행님들한테 공부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슈즈 클린 맨, 이런 거. 하하하.”

“아, 그렇나? 천만다행이다.”

찬우는 이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보선이가 말을 이었다. 한숨이 섞인 투였다.

“창수, 택기. 나는 그 자식들하고 별로 안 친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했다. 어느 날 망미동에서 연산 중학교 애들이랑 패싸움이 붙었는데, 거기서 어울리게 된 거다. 조금 힘들 때였거든. 나는 왜 이래 불행하나? 우리 아버지는 왜 저 모양인가?”

그 대목에서 병철이는 조금 뜨끔했다. 보선이가 병철이의 어깨를 툭 쳤다.

“맨날 동네 코흘리개들 돈 뜯고, 가게에서 물건 훔치고. 나중에는 저거가 훔친 것도 조무래기들한테 덮어 씌우더라.”

묻지도 않았는데 보선이는 술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신나더라고. 내 맘대로 만화도 보고, 오락실에도 가고. 근데 갈수록 이건 아이다 싶데. 그러던 중에 그때 너거하고 그 일이 있었다. 더 이상 어울리면 안 되겠다 싶은데 도저히 말을 못 꺼내겠더라고. 그랬다간 맞아 죽거든. 그런데...”

“근데?”

“그렇게 마음이 복잡한데, 그날 저녁에 현광이가 찾아왔더라고. 우리 집에.”

“현광이가?”

“응. 나는 우리가 빼앗은 돈 돌려받으러 온 줄 알았는데 그기 아이고, 현광이가 내한테 그라더라고. 친구 없으면 자기들이랑 같이 놀자고. 그때까지 내한테 같이 놀자고 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거든. 창수나 택기가 놀자는 거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 아이가.”

“아하, 그런 일이 있었나?”

“그라고 현광이가 그라데. 우리는 아직 어리지만, 그래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빨리 고치면 된다고.”

“현광이, 간 크네? 그러다가 니한테 맞으면 우짤라꼬.”

병철이의 말에 보선이가 허리를 젖혀 웃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바로 창수하고 택기를 찾아갔지. 어렵게 찾고 보니 그 자식들은 빈 집에 모여서 본드를 빨고 있더라고.”

“본드?”

병철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내보고도 하라는데 그건 진짜 아이다 싶더라. 인자 같이 안 다닐 거라고 내가 말하니까 택기가 내를 죽일라 하더라고. 그래서 한 판 붙었다 아이가. 그런데 내가 육 학년인 택기한테 상대가 되겠나. 엄청 얻어맞고 있는데 근데, 창수가 나를 구해 주더라. 물론 그 자식도 나쁜 놈인데 그때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가라면서, 다시는 보지 말자꼬, 쫌 멋있게 말하데. 그래서 글마들하고 헤어졌다 아이가.”

“……”

“안 할 말로, 내가 싸움도 하고 남의 돈도 빼앗아 보았지만, 적어도 중독되는 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중독은 본드를 말하는 것이라고 찬우는 생각했다.

“마침 그때 자애원도 없어졌고. 택기는 사고 치고 소년원으로 갔고, 창수는 광준가 어데로 갔다 하던데.”

꽤나 놀랄만한 일을 보선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찬우와 병철이는 여전히 듣고만 있었다. 보선이가 팔에 낀 토시를 빼며 말했다.

“그라고 우리 아버지는, 죽었다.”

찬우와 병철이는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짜다가?”

“머 우짜기는. 맨날 술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어데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내가 학교 그만두고 얼마 안 됐을 때, 자갈치 바다에 빠져서 죽었다고 어른들이 그러더라. 술에 취해 발을 헛디딘 것 같다 하데.”

보선이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찬우는 보선이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냥 당감동에서 화장해서 그 뒷산에 뿌맀다.”

“그랬나?”

“그라모 보선이 너거 어머니는?”

“우리 엄마?”

보선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보선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찬우가 보선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이다. 조금 창피하긴 한데, 우리 엄마 지금 병원에 있다.”

“병원에는 왜?”

“아버지한테 너무 많이 맞아서 뼈도 다쳤고, 또 제대로 못 묵어서 영양실조도 왔다 하더라. 지금 부산 대학 병원에 입원 중이다. 사실은 그래서, 내가 구두닦이 시작한 거다. 엄마 병원비는 벌어야겠더라고. 중국집 배달은 시간이 안 맞아서 안 되겠더라. 구두닦이는 낮엔 조금 바쁘지만 저녁이 되면 행님들한테 공부도 배우고, 또 밤에는 엄마한테도 갈 수 있거든."

"......"

"만약 우리 엄마 없었으면 나는 아마 지금도 택기나 창수 꽁무니 따라다니면서 본드나 불고 있을 끼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나라도 정신 차려야겠더라. 우리 엄마, 그래도 한 번은 행복하게 살게 해야 안 되겠나?”

보선이의 눈에 얼핏 눈물이 비쳤다.

“근데 보선아, 니는 우리가 안 물어봤는데 머 할라꼬 그런 거 다 말해 주노?”

그 말에 보선이가 식 웃었다.

“그냥, 그냥 말해주고 싶더라고. 너거가 아니라도 누구한테나 한 번은.”

찬우와 병철이는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보선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거 때문에 깜박하고 있었다. 내, 빨리 밥 교대해 주러 가야 된다. 두 시부터 점심시간이거든.”

“점심을 두 시에 묵나?”

“응, 구청 아저씨들이 밥 묵는 시간 동안 퍼뜩 구두 닦아 줘야 되니까, 우리는 그거 마치고 묵는다. 오늘은 너거 때문에 내 밥 굶었다. 책임지라, 임마들아.”

“진짜가? 미안해서 우짜노? 빵이라도 사 오까? 선생님이 돈 준 거 남았는데.”

그 말에 보선이가 또 웃었다.

“아이다, 임마. 농담이다. 내 자리에 가면 우유하고 빵 있다. 그라믄 나중에 또 보자. 나중에는 꼭 점심시간에 맞춰서 온나. 내가 짜장면 사 주께.”

“그래, 퍼뜩 가 봐라.”

찬우와 병철이도 엉거주춤 일어났다. 보선이는 잘 가라는 말도 않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런데 저만치 갔던 보선이가 다시 이 쪽으로 뛰어 왔다.

“아이고, 내가 오늘 너그 때문에 죽는다. 헥헥.”

“무슨 일이고, 보선아?”

“음, 딴 기 아이고……”

보선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병철이에게 한 발 다가섰다.

“병철아,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돈 벌어서 주께.”

그러면서 병철이의 주머니에 뭔가를 재빨리 쑥 집어넣은 보선이는 다시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당황한 병철이가 주머니 속의 것을 꺼냈다. 그것은 구두약이 여기저기 묻은 천 원짜리 두 장이었다. 그것을 손에 든 채로 병철이는 멍하니 찬우를 쳐다보았다.




"현광이랑 보선이랑 그런 일이 있었구나."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찬우가 말했다.

“병철아.”

“응?”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 거고?”

“어른? 나이를 묵으면 어른이 되는 거 아이가?”

“근데 우리랑 같은 나인데 보선이는 벌써 어른이 된 것 같다. 맞제?”

“……”

병철이는 대답 없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찬우야, 찬우야.”

병철이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겨우 눈을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에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버스는 신호를 받고 서려던 참이었다.

“저, 저기, 혹시 너거 아버지 아이가?”

“어데?”

찬우가 눈을 비비면서 두리번거렸다.

“저기 말이다. 신호등 밑에.”

병철이가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아버지가 서 있었다.

“어? 맞네? 우리 아버지네.”

“너그 아버지도 양복 입고 출근하시나?”

병철이가 킥킥거렸다.

“아닌데? 오늘 아침에 작업복 입고 나가셨는데? 집에 다시 오셨나?”

“억수로 좋은 데 가시는갑네. 꽃다발도 들고 계시네. 쥑이네.”

근사한 양복 차림에다 꽃다발까지 든 찬우 아버지는 가벼운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찬우는 재빨리 버스 뒷자리로 갔다. 창 너머의 아버지는 그 달음으로 길가에 있는 어떤 가게 속으로 사라졌다. 아버지가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수아 양장점이었다. 찬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계속)



* Image by Анна Иларионова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