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찬우야. 원래는 선생님이 가야 하는데 갑자기 연미 국민학교에서 긴급회의를 한다고 연락이 왔네. 오늘은 너희들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려던 참에 김명숙 선생님은 찬우와 병철이를 교무실로 불렀다. 두꺼운 서류 봉투 하나를 주면서 그것을 동래 구청 담당자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선생님이 출장을 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따분하게 자습이나 해야 될 상황이었는데, 아이들이 교실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그것도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다녀오게 된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큰 즐거움이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들 중에서 특별히 자신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것이, 선생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믿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찬우와 병철이는 교실에서부터 싱글벙글이었다.
“와아, 좋겠다. 찬우야.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나?”
아섭이가 교실 문 앞까지 따라 나오며 졸라댔다.
“이 바보야, 내가 가라 마라 하는 게 아니라니까.”
“우리는 선생님께서 특별히 뽑아주신 최우수 모범 학생들이거든.”
자리에 앉아 있는 현광이를 향해 병철이는 힘껏 주먹 감자를 날렸다. 현광이는 그것을 손으로 받는 동작을 하더니 아섭이의 가방 속으로 넣어 버렸다.
선생님의 심부름은, 동래 구청 교육계에다 지난번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봉투 안에는 중요한 서류도 있지만, 약간의 돈도 들었으니까 특별히 조심해야 된다. 큰길 정류장에서 51번 타고 동래 구청 앞에 내리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잘 모르겠다 싶으면 안내양 누나한테 물어보고.”
선생님은 그러면서 찬우에게 오백 원을 따로 주었다. 그것으로 차비를 내고 음료수도 사 먹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바깥사람들은 억수로 바쁘게 다닌다, 맞제?”
버스 유리창에 코를 댄 채로 병철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라모 병철이 니는, 우리가 학교 가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얼음, 하면서 그대로 굳어 있는 줄 알았나?”
찬우가 병철이의 뒤통수를 살짝 밀었다. 그 바람에 병철이가 창문에다 쿵 머리를 박았다. 뒷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던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내릴 데를 지났다며 차 세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찬우와 병철이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가린 채 킥킥거렸다.
“아이구, 공부 잘하는 동명에서 왔네.”
출납계 담당 직원은 찬우가 건넨 봉투를 받으며 반갑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 속에 들어 있는 돈과 서류를 확인했다.
“그래, 맞네. 정확하다."
직원이 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 학교 좋제? 아저씨는 연산 국민학교 졸업했다 아이가.”
“아, 그렇습니꺼? 그때도 연산이 있었습니꺼? 저희들도 작년까지 거기 다녔어예.”
병철이가 나서서 아는 체를 했다.
“그래, 동명은 올해 새로 개교했제? 하여튼 수고했다. 자, 그라모 아저씨가 영수증을 만들어야 되니까 이거 마시면서 저기서 잠시 기다리라.”
출납 직원은 빨대가 꽂힌 요구르트 두 개를 건네주었다. 찬우와 병철이는 그것을 받아 들고 화분이 놓여 있는 긴 탁자 끝 소파에 앉았다. 한낮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구청을 드나들었다. 병철이는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찬우야! 찬우야, 저기, 저기 봐라.”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던 병철이가 갑자기 다급하게 찬우를 불렀다. 책을 읽던 찬우가 고개를 들었다.
“왜? 먼데?”
“저, 저기……”
“응?”
찬우는 병철이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로 분주한 사무실 한편에서 찬우 또래의 아이 하나가 직원들의 책상 사이를 잽싸게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아이는 양팔에 토시를 차고서 서너 켤레의 구두를 들고 있었고, 볼에는 흔히 그렇듯 구두약이 아무렇게나 묻어 있었다. 구두닦이인 듯한 그 아이는 분명, 보선이었다. 담장에 걸렸던 하얀 이불과 집 안에서 들리던 비명 소리, 현광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병철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찬우와 병철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보선이는 여전히 분주했다. 찬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힘을 주어 불렀다.
“보선아.”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보선이는 구청 직원들과 구두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병철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나팔처럼 만들어 목청을 높였다.
“보선아, 보선아.”
구두를 건네주며 굽신굽신 인사를 하던 보선이가 소리를 들었는지 그제야 이 쪽을 쳐다보았다. 찬우는 순간 보선이가 휙 달아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런데 보선이는 동작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서더니,
“어어? 니 병철이 아이가.”
하며 환하게 웃었다. 찬우는 겨우 안심이 되었다. 병철이도 보선이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찬우와 병철이는 천천히 보선이에게 다가갔다.
“어, 찬우야. 니도 왔나? 너거 여기 웬일이고?”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려던 보선이는 문득 자기 손을 쳐다보고는 재빨리 등 뒤로 감추었다. 병철이가 보선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진짜 오랜만이다. 보선아, 잘 지냈나?”
“와, 진짜 반갑네. 병철이 니는 키가 좀 컸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통로를 막고 선 것도 잊은 채, 셋은 반가워서 어쩔 줄 몰랐다.
“어이, 동명.”
영수증을 정리하러 갔던 출납 직원이 이 쪽에 서 있는 아이들을 큰 소리로 불렀다. 보선이도 찬우와 병철이를 따라 직원의 책상 앞으로 갔다. 직원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 너거가 똘똘이를 우째 아노?”
“똘똘이예?”
그러자 보선이가 병철이의 어깨에다 대고 낮은 소리로,
“내 이름이 여기서는 똘똘이다. 히히.”
하며 코를 쓱 훔쳤다. 그 바람에 또다시 콧잔등에 구두약이 묻어났다.
“선생님, 보선이가 똘똘입니꺼?”
“보선이? 그게 똘똘이 이름이가? 맞다. 이 동래 구청에서 똘똘이를 모르면 간첩이다. 얼마나 부지런하고, 또 구두는 얼마나 잘 닦는지 아나? 구두 박사다, 구두 박사.”
직원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보선이는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에 찬우는 웃음이 나왔다.
“야아, 진짜 너거가 똘똘이를 우째 알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직원이 재차 물었다. 찬우와 병철이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친굽니더. 억수로 친합니더.”
그 말에 보선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