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살 거면 저리로 좀 가라. 그렇게 입구를 딱 막고 서 있으면 우짜노?”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는 듯 과일 가게 아주머니는 한참만에 볼멘소리를 했다. 찬우가 화들짝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찬우가 꾸벅 절을 했다. 뜻밖의 예의에 아주머니의 성난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머, 그 정도로 죄송할 건 아니다만 그래도 남의 가게 앞을 그렇게 딱 막고 서 있으면 안 된다 아이가."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 꼬마야, 지금 누구 기다리나?”
아주머니가 찬우의 눈높이로 허리를 숙이더니 주위를 훑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자 아주머니는 금세 정답을 알았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아하, 알았다. 니도 저 양장점 수아 보러 왔는갑네?”
수아라는 이름에 깜짝 놀란 찬우는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창피해할 거 없다. 니뿐만 아니다. 이 동네 머스마들이 수아 얼굴 한 번 보고 갈라꼬 우리 집 앞에 맨날 줄을 선다 아이가. 수아는 인기도 좋제? 갸들이 과일 한 개씩만 사도, 우리 집은 진작에 부자 됐을 끼다."
"......"
"그래, 니도 거기서 쫌 기다려봐라. 수아는 좀 전에 집으로 들어갔으니까. 혹시 아나? 운 좋으면 수아 얼굴 함 볼 수 있을지. 하이튼 요새 머스마들은 참 웃긴데이. 벌써부터 예쁜 건 알아 가지고, 참말로.”
“……”
함께 심부름 나온 병철이를 혼자 학교로 보낸 다음, 찬우는 버스에서 내려 길을 되짚어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아버지는 여전히 저 수아 양장점에 있을 것이다. 속이 울렁거리고 입술이 탔다. 아버지가 어떻게, 아버지가 왜 수아네 옷가게로 들어간 것일까?
“혜원 씨.”
“아, 상현 씨, 오셨어요?”
찬우 아버지, 상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아 어머니, 혜원이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웬 양복 차림이세요? 아주 근사하신데요?”
혜원의 칭찬에 상현은 기분이 좋아졌다. 뒷머리로 손이 올라갔다.
“맨날 작업복만 입다 보니까 사람도 초라해 보이고, 그러다 보면 혜원 씨가 저를 그런 이미지로만 생각할 거 아입니꺼? 양복 입은 모습도 한 번 보여드리고 싶어서 큰맘 먹고 외출했습니더.”
“외출까지요? 양복 참 멋지네요. 뭘 입어도 멋져요, 상현 씨는.”
“하하하. 그렇습니꺼?”
상현은 또다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점심 식사는요?”
“네, 아까 회사에서 행님하고 먹었습니더.”
“우리 오빠랑요? 웬일이래, 웬만해선 남하고 커피도 안 드시는 양반이... 하긴 상현 씨가 말씀하시면 하루에 다섯 끼도 드실 거예요, 우리 오빠는.”
“아입니더. 행님이 회사에서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모릅니더. 내년에 부장으로 진급하신다 하데예.”
“정말요? 부장 진급요?"
"네, 워낙 일을 잘하시니까요."
"아니에요. 오빠가 여전히 일할 수 있는 건 전부 상현 씨 덕분이라구요. 상현 씨가 아니었다면……”
“아, 아입니더. 제가 아니라 그 상황에선 누구라도 그랬을 낍니더. 자꾸 그라지 마이소. 그러시면 행님 때문에 혜원 씨가 저를 억지로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아입니꺼?”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혜원이 다시금 밝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상현은 오 년 전의 그날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에애애애애애앵.
소음으로 시끌벅적하던 대양 고무 부산 공장에 갑자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오후 두 시를 지날 무렵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현장 감독실에서 작업 상황판을 보던 황 충성 과장이 비상벨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작업 1반 박 동철 대리가 헐떡이며 감독실로 뛰어 들어왔다.
“과, 과장님. 큰일 났습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임 진택 차장님이, 임 차장님이……”
“임 차장님이 왜?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임마!”
“기계에 팔이 끼었습니다.”
“뭐, 뭐야? 야이 자식아. 현장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그런 일이... 근데 차장님이 라인에는 왜 내려 가신 거야?”
“신입 직원이 작업이 서툴러서 그거 도와주신다고 가셨다가……”
“임마. 빨리 119 신고해. 그리고 기계 내려.”
“신고는 했습니다. 과장님, 그런데 정지 버튼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기계의 정지 밸브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
“뭐라구?”
황 과장의 눈이 더욱 커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내 팔, 내 팔. 아아아악.”
운동화의 밑창을 찍어 내는 성형 기계에 팔이 낀 채로 임진택 차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 번에 오백 장의 운동화 밑창을 찍어내는 기계의 압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나마 옆으로 밀려난 고무 덩어리가 압력을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과 함께 빨려 들어간 임 차장의 팔은 이미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고무가 천천히 뒤틀리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듯싶었다.
“차, 차장님. 괜찮으십니까?”
황 과장이 임 차장의 뒤에서 소리쳤다.
“으아아아아…… 기, 기계를 빠, 빨리 꺼…….”
임 차장은 점차 강해지는 압력 때문에 점점 말할 기운조차 잃었다.
“아, 알겠습니다. 야! 공장 전원 내려!”
황 과장이 벽면의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이 자식들아, 뭐해? 빨리 전원 내리라고!”
그러자 스피커 저쪽에서 겁에 잔뜩 질린 박 대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과, 과장님. 전원 스위치에 전기가 흐릅니다.”
“뭐? 그럼 장갑을 끼고 막대걸레로 내려쳐! 어서!”
하지만 프레스의 고장을 알리는 빨간 등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악.”
“야! 파이프라도 줘. 파이프 어딨어?”
누군가가 옆에 놓여 있던 쇠 파이프를 급히 황 과장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것을 기계 사이에 넣어 지렛대로 버텨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반대쪽 걸림 고리가 없어서 파이프는 넣으면 넣는 대로 번번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임 차장은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다들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으아아악. 제발.”
그때였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보고만 있을 거가, 이 답답한 사람들아!”
누군가 소리를 치며 기계 옆으로 재빨리 다가섰다. 그는 양산 공장에서 근무하는 강 상현 대리였다.
“차장님예, 조금만 힘을 내시소. 제가 빼 드리겠습니더.”
강 대리는 기계에 끼어 있는 임 차장의 팔에다 윤활유를 확 끼얹었다.
“차장님, 이제 제가 다리를 넣어서 상판을 들어 올릴 테니 하나, 둘, 셋 하면 팔을 빼시소. 아시겠지예?”
“으, 으응.”
임 차장이 마지막 힘을 다해 겨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차장님예, 들어갑니다. 하나, 두울, 세엣!”
구령과 함께 강 대리는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기계 사이로 밀어 넣었다.
“끄으으으으으으응.”
그의 다리에서 굵은 핏줄들이 툭툭 튀어 올랐다. 기계가 끼이익 소리를 냈다.
“차아자앙니임, 빠알리이. 끄아아아.”
마지막 힘을 다해 강 대리가 성형 기계를 버티는 동안, 임 차장 역시 안간힘을 다해 팔을 잡아당겼다. 흠뻑 적셔진 윤활유 때문인지 임 차장의 팔이 조금씩 움직였다.
“와, 나온다. 나온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강 대리는 다시 한번 다리에 힘을 주었다.
“끄아아아아아아, 차장니이임. 빠알리...”
“으아악.”
기합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강 대리가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그러자 마침내 임 차장의 팔이 기계에서 쑥 하고 빠져나왔다. 팔은 살이 찢어져 뼈가 다 보이는데다 피까지 철철 흘러 한눈에도 끔찍했다. 그러나 팔을 수습할 생각도 않은 채 임 차장이 다시 소리쳤다.
“강 대리, 야, 강 대리!”
억지로 버티던 강 대리는 임 차장의 팔이 기계 밖으로 빠져나온 것을 보고서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거꾸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강 대리, 강상현, 야 임마, 강상혀어어언.”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삼 개월 동안 갑갑하셨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태가 심각했었지만 현장에서의 응급조치가 잘 되었고 수술 뒤 지금까지의 경과도 아주 좋습니다. 두 분 모두 정말 다행입니다.”
담당 의사가 퇴원 확인서에 서명을 하면서 웃었다.
“임진택 씨는 골절, 근육 파열, 피부 열상, 강상현 씨도 골절에 근육 파열과 열상. 두 분 똑같습니다."
임 차장과 강 대리가 서로를 보며 다시 웃었다.
"그런데 사고 정황은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대체 어쩌자고 강 대리님은 그 기계에다 다리를 넣었습니까? 무식하게 말입니다.”
의사의 물음에 강 대리는 내심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더.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그때 큰 실수 했제. 고참 하나 저 세상 보내고 빨리 진급할 수 있었는데, 아깝네.”
“뭐 임마?”
임 차장이 강 대리를 때리려는 시늉을 하다가 아야야 하면서 팔을 감싸 쥐었다.
“저거 보이소, 선생님. 남의 은혜를 모르고 저런단 말입니다.”
강 대리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의사가 웃었다.
“보통 이런 사고는, 열에 아홉은 사고 부위를 절단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두 분은 거의 기적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물론 끼어 있는 고무 덕에 직접 압박을 피하기도 했지만요."
"맞습니다. 기적입니다. 우리 공장도 아닌 다른 곳에 근무하던 강 대리가 그 시간에 거기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강 대리가 아니었으면..."
임 차장이 말끝을 흐렸다. 의사가 설명을 이었다.
"좋습니다. 입원 치료는 오늘로 끝이고 내일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통원 치료를 받으셔야 되니까 빠지지 마시구요. 다친 부위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되십니다. 특히 강상현 씨는 갑갑하다고 목발 버리시면 절대 안 되구요. 다행히 가을이라 그리 덥지 않으니까 땀이 차거나 수술 부위에 괴사가 생기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재활만 잘하시면 두 분 모두 육 개월 즈음 후에는 정상적으로 생활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이고, 육 개월이나요? 내는 다리 아파서 꼼짝도 못 하니까 차장님이 내 업고 다니소.”
“나는 팔이 아파서 못 업어. 매달릴 자신만 있으면 내가 업고 다닐게.”
계속된 두 사람의 농담에 주위에 섰던 간호사들도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는 눈치였다. 농담을 던지면서도 임 차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고맙다. 상현아. 평생에 걸쳐 이 빚을 갚으마. 절대 잊지 않을게.’
퇴원 날이 되었다. 짐을 챙겨 병실 문을 나서는데 복도 끝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달려왔다.
“아빠.”
강 대리는 목발을 바닥에 놓아 버리고 두 손으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이, 강찬우. 잘 있었나?”
찬우가 아빠의 볼에 뽀뽀를 했다. 찬우를 안고 병원 로비로 갔다. 임 차장과 그의 가족들이 서 있었다.
“차장님, 제 아들입니더.”
임 차장이 웃으면서 찬우를 받아 안았다.
“고 놈 참 귀엽네. 참 그리고 강 대리, 인사해라. 여기는 내 여동생이다. 혜원아, 이 친구가 내 생명의 은인, 강 상현 대리다.”
소개를 받은 임 차장의 여동생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여동생은 살짝 고개를 숙여 강 대리에게 인사를 했다. 순간 상현은 태양을 바로 쳐다본 것처럼 눈이 부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 태양의 뒤로 사라져 버렸다. 인사를 해야 된다는 생각마저 잊은 채, 혜원을 쳐다보며 상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벌써 오 년 전의 일이다.
상현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참, 그라고 이거 받으이소.”
“예쁜 꽃이네요.”
상현이 건넨 꽃다발을 혜원이 받아 들었다.
“가을이라 국화가 좋다고 하데예. 물론 꽃집 주인이 한 말입니다만.”
상현이 다시 얼굴을 붉혔다.
“상현 씨나 찬우나 얼굴 붉어지는 건 유전인가 봐요. 수아 말로는 찬우도 얼굴이 자주 빨개진대요.”
수아란 말에 상현이 두리번거렸다.
“아, 맞다. 수아는 학교에서 왔습니꺼?”
“왜요? 보고 싶으세요?”
“물론이지예. 맨날 생각난다 아입니꺼.”
“찬우보다요?”
“하하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예.”
“수아 보실래요, 지금?”
“아, 아닙니다. 여기 있으면 그냥 보는 거고 지금 공부하고 있을 낀데, 따로 부르지는 마이소.”
상현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혜원 씨.”
혜원도 탁자 앞으로 다가앉았다.
“수아 데리고 이번 주말에 남해 가신다면서예?”
“네, 수아한테도 이야기해 두었어요. 수아는 처음이니까.”
“해마다 굳이 그랄 필요 있습니까?”
“그냥... 제가 그러고 싶어서요.”
혜원이 조용히 찻잔을 잡았다. 머뭇거리던 상현이 말을 이었다.
“그라고, 그때 조언해 주신 대로 인자 저도 찬우한테 말을 할까 싶습니더.”
“정말요? 그런데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머, 지가 우짜겠습니꺼? 어른들이 하는 일인데.”
“그래도 찬우가 상처를 받는 건 아닐지. 그리고 상현 씨와 제가 이렇게 지내왔다는 걸 알면 혹시나 충격을 받을까 싶어 걱정이 되네요, 저는.”
혜원이 깍지를 끼고 턱을 고였다.
“머스마니까 잘 이해할 낍니더. 지난봄까지만 해도 어렵겠다 싶던 수아 역시 지금은 이렇게 흔쾌히 마음을 열고 저를 받아들였다 아입니꺼? 찬우라꼬 머, 별다른 게 있겠습니꺼? 찬찬히 설명하고 알아듣도록 말하면 될 낍니더.”
“그래요. 그래도 마음 상하지 않도록 잘 얘기해 주세요. 남자잖아요. 찬우와 말씀하시는 건 저도 상현 씨 뜻을 따를 게요.”
“네, 고맙습니더.”
“그리고 찬우하고도 얘기가 잘 되면 애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자리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라지예. 아 참, 그리고 행님도 같이 식사 한 번 하자 하시던데예.”
“아이 참, 오빠는 왜 자꾸 우리 사이에 끼려고 하는 거죠?”
“추석도 다 돼가고 하니까 겸사겸사.”
“오빠가 언제, 명절이라고 동생 챙기는 거 봤어요?”
“머, 실은 행님이 우리 두 사람의 중매를 선 거라고 양복 한 벌, 양복 한 벌, 노래를 부르시던데예.”
상현이 웃었다.
“오빠는 양복도 안 입으면서, 웃겨, 정말. 오빠가 자꾸 그러면 오빠 소개로 만난 게 아니라 여기 사는 동네 할머니를 통해서 한 거라고 하세요.”
“예? 동네 할머니예?”
상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폈다.
“참, 모르셨죠? 지난여름이었나? 어떤 할머니를 통해서 상현 씨를 만나 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참 세상 좁구나 싶었죠. 그때 제가 일부러 상현 씨에게 말 안 했어요. 혹시나 오해하고 또 오해받으실까 봐.”
상현은 명희 할머니가 했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게 바로 혜원 씨였구나.
“그럼 혜원 씨, 지는 인자 가 볼랍니더.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 되거든예. 아시안 게임 때문에 회사가 정신없는데, 다음 달에 혹시 올림픽 개최까지 결정되면 완전 비상이지예. 인자 토요일, 일요일도 없을 낍니더. 행님이, 지금도 저를 찾아서 난리가 났을 낍니더.”
“네, 고생하시구요.”
“저……그라고.”
혜원은 상현을 쳐다보았다.
“정말 고맙습니더. 내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그러면서 상현은 조용히 혜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혜원도 말없이 두 손을 잡았다.
한참 만에 양장점의 문이 열렸다. 틀림없었다. 길로 나선 사람은 역시 아버지였다. 찬우는 혹시라도 들킬까 봐 재빨리 과일 상자 뒤로 몸을 숨겼다.
“꼬마야, 저거는 수아 아이다. 야가 헛것이 보이나? 다시 똑바로 함 봐라.”
과일 가게 아주머니가 채근을 했지만 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양장점에서 수아 어머니가 따라 나왔다. 아버지는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고 수아 어머니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들고 있었던 꽃다발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버스가 가버리고 난 뒤에도 수아 어머니는 한참 동안 그쪽을 향해 있었다.
“아이고, 오늘은 공치는 날인갑다. 내가 기다리는 손님도 없고, 니가 기다리는 수아도 안 보이고... 인자 가라. 엉? 이 머스마, 그새 어데 갔노?”
과일 가게 아주머니는 허공에다 대고 파리채를 두어 번 휘둘렀다.
집으로 돌아온 찬우는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우연히 들린 거겠지. 이모 옷을 사러 갔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양복은? 그런데 꽃다발은? 그런데 수아 엄마는? 그런데 수아는?’
머리가 아프다며 아버지가 먹던 약이 생각났다.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약통이 보였다. 노란 통을 흔들어 보니 소리가 났다. 몇 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겉면에 적힌 용법을 읽고는 다시 서랍 속에 넣으려는데 아버지의 수첩 사이로 뭔가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찬우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진이었다.
찬우가 집어 든 사진 속에는, 어딘지 알 수 없는 푸른 풀밭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수아 어머니, 그리고 수아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