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헤어짐

by 진우


“이수아, 니 이거 좀 묵어 봐라.”

명희가 생글거리며 수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때 수아는, 분명히 챙겨 넣었다고 생각한 준비물이 보이지 않아 가뜩이나 난처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달갑지 않은 명희의 접근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뭔데?”

전에 없이 생뚱맞은 친근함은 수아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으응, 이거 김밥이다. 내가 오늘 아침부터 싼 기다.”

“뭐? 김밥?”

들장미 소녀 캔디가 그려진 양은 도시락을 건네받았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제법 속이 알찬 김밥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근데 박명희, 이걸 나한테 왜 주는 거지?”

명희는 슬그머니 수아의 옆자리에 앉아 두 손을 턱에 괴고 애써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수아 니 묵으라꼬.”

“내가 왜 이걸 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퉁명스러운 수아의 말투였지만 명희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입가에 웃음부터 한가득 머금었다.

“이유가 따로 있겠나? 우리는, 친구 아이가.”

수아는 멍한 얼굴로 명희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한 분단을 건넌 저만치에서 찬우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쟈가 지금 또 수아한테 무슨 수작을 하는 기고?'

하지만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자습 준비나 해야겠다 싶었던 찬우가 공책을 챙기려는데 서랍 속에 웬 봉투 하나가 만져졌다. 뭔가 싶어 꺼내 보니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손으로 봉투 입구를 받치고 뒤를 들었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굴러 나오는 것이 있었다. 샤프였다.

‘이거 샤프 아이가? 어데서 많이 본 건데?’

꽤나 낯익은 샤프를 들고 기억을 헤집는데 여전히 봉투 안에 남은 것이 있었다. 쪽지였다. 찬우는 흠칫 놀라 주위를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꺼냈다. 펼쳐 든 쪽지에는 삐뚤빼뚤 글씨가 적혀 있었고, 그것은 한눈에 봐도 누구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강찬우, 니는 인자 학실하게 내 꺼다 - 박명희]


아, 맞다. 이건 그때 명희가 생일 선물로 줬던 흔들어 샤프구나. 찬우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명희가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찬우에게 날리고 있었다. 찬우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줐다가 뺏았다가 욕본다, 가시나.’


12월이 되자 찬우 아버지와 수아 어머니는 전에 없이 바빠졌다. 양쪽 집안 어른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올해가 가기 전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라며 후다닥 날짜를 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봄을 예상하며 진득하게 여유를 부렸던 찬우 아버지도 갑자기 날짜가 정해지다 보니 챙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아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덩달아 찬우와 수아도 수업 준비물을 빠뜨릴 만큼 정신없이 바빠졌다.

수아는 짐을 찬우네로 미리 옮겨야 했고, 찬우도 새로 만든 방 정리 때문에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빨리 가야 했다. 그전처럼 아이들과 우물터에서 공을 차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 그다음 문단, 그래, 명기가 읽어 보자.”

김 선생님이 국어 책을 고쳐 들고 명기를 바라보았다. 네, 대답과 함께 일어선 명기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쪽엔 박하 향기가 나는 납작한 박하사탕이 있었다. 그리고 쟁반에는 조그만 초콜릿 알사탕, 그 뒤에 있는 상자에는 입에 넣으면 흐뭇하게 뺨이 불룩해지는 굵직굵직한 눈깔사탕이 있었다. 단단하고 반들반들하게 짙은 암갈색 설탕 옷을 입힌 땅콩을 위그든 씨는 조그마한 주걱으로 떠서 팔았는데, 두 주걱에 1센트였다. 물론 감초 과자도 있었다. 그것을 베어 문 채로 입 안에서 녹여 먹으면, 꽤 오래 우물거리며 먹을 수 있었다.

이만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내가 이것저것 골라 내놓자, 위그든 씨는 나에게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너, 이만큼 살 돈은 가지고 왔니?"
"네."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먹을 내밀어, 위그든 씨의 손바닥에 반짝이는 은박지로 정성스럽게 싼 여섯 개의 버찌 씨를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위그든 씨는 잠시 자기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더니, 다시 한동안 내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것이었다.

"모자라나요?"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나서 대답했다.

"돈이 좀 남는 것 같아. 거슬러 주어야겠는데……."

그는 구식 금고 쪽으로 걸어가더니, '철컹' 소리가 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러고는 계산대로 돌아와서 몸을 굽혀, 앞으로 내민 내 손바닥에 2센트를 떨어뜨려 주었다.


“참 잘 읽었어. 이 이야기는 폴 빌라드란 사람이 쓴 이해의 선물이라는 소설인데...”

“선생님예.”

누군가가 선생님을 불렀다. 아이들이 돌아보았다. 화영이었다.

“응, 화영아. 뭐니?”

화영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울먹울먹 했다.

“왜 그래? 화영아. 어디 아프니?”

“서, 선생님예.”

화영이는 선생님을 다시 불렀다.

“그래, 말해 봐. 뭐니?”

“선생님, 오늘 교무실에서 들었는데, 선생님 이민 가신다면서예.”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 채로 훌쩍거리던 화영이는 곧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었다.

아섭이가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여 병철이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병철아, 이민이 머꼬?”

“외국으로 간단 말이다.”

“외국으로? 머 하러?”

“이사 가는 거다.”

아, 그렇구나 하며 아섭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갔다가 안 오나?”

“갔다가 오면 그게 여행이지, 이민이가. 이 바보야.”

병철이의 면박에 아섭이는 입을 꼭 다물었다.


선생님은 화영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어깨를 들썩이는 화영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에그. 내가 오늘 수업 마칠 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우리 화영이가 먼저 알아버렸네? 그래, 맞아. 선생님은 이번 겨울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됐어. 그래서 이번 학기가 동명에서 마지막이 될 것...”

선생님 역시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서서 안경을 벗었다. 그걸 본 화영이는 더 큰 소리를 냈고 다른 여학생들 몇몇도 덩달아 훌쩍였다.




“찬우는 어데 갔노?”

책상을 들어 나르면서 현광이가 말했다.

“글마는 요새 아버지 결혼 땜에 정신없다.”

병철이가 밀대 걸레와 물통을 챙겼다. 일주일째 교실 청소를 맡고 있던 참이었다.

“아, 그렇나? 결혼식은 언제 한다더노?”

“다음 주 일요일이라 하데.”

“어데서?”

“우리 학교 강당에서.”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섭이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민은 머 때문에 가노?”

이번엔 현광이가 불만 섞인 말투로 선생님의 이민을 꺼냈다.

“선생님한테도 사정이 있겠지. 가족들이랑 간다 했잖아.”

“그럼 이제 미국 가서 아이들 가르치는 건가?”

아섭이는 병철이의 눈치를 살폈다.

“미국에도 한국인 사는 동네가 있다고 하니까 거기 가서도 선생님 하면 되겠지.”

"......"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아이가.”

병철이가 혼잣말을 했다. 걸레질을 하던 현광이와 아섭이가 병철이를 돌아보았다. 무슨 결심을 했는지 병철이는 주먹까지 흔들어 보이며 비장하게 말했다.

“아섭아, 현광아.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당장 찬우 좀 불러와라.”


뒤늦게 우물가 놀이터로 불려 온 찬우가 땀을 닦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병철이 니 말은, 선생님한테 파티를 해 드리자, 그거제?”

“머, 파티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아이가.”

마치 현장을 지휘하는 형사 반장처럼 병철이는 잔뜩 폼을 잡고 말했다.

“찬우 니는 선생님이 억수로 많이 귀여워해 주셨다 아이가. 현광이, 아섭이 너거는 선생님한테 신세 진 거 갚아야 된다, 맞제? 머 나 역시 말할 것 없고. 이런 마당에 선생님이 갑자기 먼 나라로 이민 가신다 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 되겠나?”

논리와 상관없이 묘하게 설득이 되는 말이었다.

“그라모 반장인 현수한테 말해서 우리 반 전체가 다 같이 하믄 되지, 우리끼리 머 할라꼬? 내는 빨리 가야 된다.”

찬우가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병철이는, 그런 찬우의 반대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반장이 나서면 학급비를 걷고 어쩌고 하면서 말도 많아지고 또 준비할 것도 많아진다. 마, 그냥 우리끼리 오늘 해뿌자.”

“뭐어, 오늘?”

아섭이의 눈이 또 커졌다.


병철이는 아섭이와 현광이에게 무언가를 시키고는 찬우를 데리고 서둘러 놀이터를 벗어났다. 얼떨결에 알았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병철이의 계획과 명령이 미덥지 못했던 아섭이와 현광이는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만치 걸어가던 병철이가 몸을 홱 돌려 손나팔을 만들었다.

“네 시에 우리 반 교실에서 다시 모인다. 어린이 여러분들은 비밀을 지킬 것. 반드시!”


(계속)



* Image by Etienne GONTIER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