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파트

by 진우


병철이는 찬우의 팔을 잡은 채 큰길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천천히 걸어갈 여유가 없었다. 길 건너 편의 독일 제과 간판을 보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독일 제과는 동네에서 가장 큰 제과점이었다. 찬우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헥헥, 병철아. 도대체 머 할 생각이고?”

걱정 가득한 찬우에게 병철이는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케이크.”

“머? 케이크? 케이크 살라꼬? 돈은 있나?”

“사러 가는 기 아이고, 받으러 갈 끼다.”

“받는다고? 맡겨놨나? 미리 주문이라도 해 뒀단 말이가?"

찬우가 병철이의 옷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병철이의 눈은 여전히 독일 제과를 향해 있었다.

“찬우야."

"왜?"

"찬우 니, 오늘 국어 시간에 명기가 읽은 이야기, 기억 나나?”

“무슨 이야기?”

“이해의 선물!”

“그... 버찌 씨를 내밀었더니 주인이 감동해서 사탕을 공짜로 주더라는?”

병철이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찬우는 그런 병철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병철아, 그거는 지어낸 이야기다. 소설이란 말이다.”

바닥을 두리번거리던 병철이는 곧 작은 돌멩이 몇 개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옷에다 대고 몇 번씩 문질렀다.

“임마, 병철아. 제발 정신 차리라.”

“찬우야, 내 걱정은 말고 니는 좀 있다가 무거운 케이크 들고 갈 걱정이나 해라.”

마지막 결투를 위해 먼길을 떠나는 황야의 카우보이처럼 병철이는 한 손 가득한 돌멩이를 절그덕거리면서 길을 건넜다. 독일 제과의 유리문 앞에서 병철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현광아.”

“응”

“병철이가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저 호랑이 같은 사람이 우리말을 순순히 들어주겠나?”

서무실 문을 나서면서 아섭이는 걱정스러운 표정부터 지었다.

“모르겠다. 나도 내 정신이 아니었다.”

“서무 과장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그때가 떠올라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이가. 그래도 현광이 니는, 말은 억수로 잘 하데.”

현광이는 이제야 두려움이 몰려온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섭아. 나는 그날처럼 몇 대 맞을 줄 알았는데, 우짠 일로 오늘은 그냥 가라고 하지?”

“머, 안 들은 걸로 친 거 아니겠나. 니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 아이가.”

“아섭이 니 생각도 그렇제? 실패하면, 서무 과장님이 안 들어주면 우짜지?”

“하여튼 됐다. 우쨌든간에 병철이가 시킨 대로 했으니까 우린 이젠 네 시까지 기다리자.”

“근데 아섭아."

"응?"

"우리가 찬우도 아닌 병철이 말을 왜 들어야 되나?”

현광이가 아섭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아섭이는 현광이의 눈을 애써 피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병철이는 평균 칠십오 점은 넘잖아. 우리보다 공부 잘 하니까......


벽에 걸린 시계가 어느덧 네 시를 가리켰다.

현광이와 아섭이는 멀리 교실이 보이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았다. 김 선생님이 교실에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잠시 후 반대편 복도 끝에서 발소리와 함께 찬우와 병철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 현광아. 저기 찬우랑 병철이 온다.”

아섭이가 과장된 몸짓으로 손가락을 입에 대며 찬우와 병철이를 향해 미리부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현광이와 아섭이는 옆반 교실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찬우와 병철이도 살금살금 따라 들어왔다.

“병철아, 그런데 니 얼굴이 와 그렇노?”

교실로 들어서는 병철이에게 아섭이가 물었다. 병철이의 한쪽 볼에는 손가락 다섯 개 자국이 선명했다. 병철이가 중얼거렸다.

“도, 독일 제과 아저씨는 이해의 선물 이야기를 아직 못 읽었는갑더라.”

"......"

“그건 그렇고, 아섭아. 너거는? 서무 과장님한테 말했나?”

병철이의 확인에 현광이는 고개만 겨우 끄덕거렸다. 찬우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벌써 네 신데 우짜노. 아무것도 준비를 못했다 아이가.”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졌던 병철이가 벌떡 일어섰다. 뭔가를 결심한 듯했다.

“얘들아, 케이크 없이도 그냥 우리의 순수한 마음만 선생님께 전해 드리면 안 되겠나? 중요한 건 마음이거든, 안 그렇나?”

찬우는 어이가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마음만 전하기로 했었다면, 제 볼에 저렇게 큰 손도장은 남기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은 조용히 복도로 나와 교실을 향해 걸었다. 마룻바닥이 걸음에 맞춰 삐그덕 소리를 냈다. 줄줄이 뒤로 선 아이들의 얼굴을 훑어본 다음, 찬우가 교실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끼이익.

책을 보던 김 선생님이 고개를 돌렸다.

“어, 찬우야. 아니 너희들, 아직도 집에 안 갔니? 날도 추운데. 어서 들어와.”

모두들 쭈뼛거리며 선생님 앞으로 나란히 섰다.

“근데 병철이는 얼굴이 왜 그래? 밖이 그렇게 추워?”

병철이가 벌게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선생님, 이 세상에는 이해의 선물이 아직 부족합니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선생님은 알 수 없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아섭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이민 축하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광이가 아섭이의 뒤통수를 딱 하고 쳤다.

"임마, 이민을 축하하면 우짜노? 마음이 아프다고 해야지!"

선생님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찬우는 손을 모으고 선생님 앞으로 나섰다.

“선생님예. 그동안 저희들 가르치신다꼬 고생하셨습니더.”

“저희들은 선생님 이민 가신다꼬해서 나름대로 먼가 준비할라 했는데 그게 잘 안됐습니더.”

병철이가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졌다.

“병철아, 뭐를 준비해? 그건 무슨 말이야?”

“딴 게 아니고 저희들은 그냥 선생님이랑 이별하니까 그래도 케이크라도 준비……”

그때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김 선생님과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서무 과장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서무 과장은 성큼 교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아이들을 향해 무섭게 걸어왔다. 휘젓는 한쪽 팔에는 남색 토시가 여전히 끼어진 채였다.

“이 놈의 자식들!”

불호령에 아이들이 움찔했다. 당황한 김 선생님이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려는데, 서무 과장이 또다시 목청을 높였다.

“대체 김 선생님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셨길래..."

"아니, 저희 아이들이 또 무슨 잘못이라도...?"

"내가 요 맹랑한 놈들 때문에 제 명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에요.”

서무 과장은 여태 등 뒤로 감추었던 것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손에는 커다란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케이크였다.

“서무 과장님. 이게 무엇...?

선생님은 한껏 놀란 표정으로 서무 과장과 케이크를 번갈아 보았다. 병철이는 이제 됐다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육성 회비도 제대로 안내는 녀석들이 파티는 무슨 파티야? 아주 웃기는 놈들이에요, 이 놈들은. 지들이 돈이 없으면 그냥 물이나 떠다 드릴 일이지, 누구더러 케이크를 사 내라마라 하는 거야? 어떤 놈이 두목이야? 누구 꾀야?”

나란히 선 아이들의 머리에 서무 과장은 차례로 꿀밤을 주었다. 콩콩콩콩. 아이들은 머리를 쥐어 박히고서도 서로를 보며 킥킥거렸다. 김 선생님은 이제야 모든 일의 전말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놈들아, 내가 누구라고?”

병철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서무 과장이 머리를 들어 물었다. 아섭이와 현광이는 마치 짠 것처럼 목소리를 맞추어 크게 대답했다.

“네, 우리 학교의 주인이십니더.”

"그렇지, 그렇지."

서무 과장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책상 앞으로 한 발 다가온 서무 과장은 김 선생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김 선생님, 그동안 고생 참 많으셨습니다. 이런 맹랑한 놈들 가르치시느라..."

"아닙니다, 서무 과장님."

"석유 파동이 나고서부터 교육청 지원도 많이 줄어들었고, 그래서 학교 살림살이도 조금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학생들에게 모진 말과 나쁜 행동을 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이해하고 용서해 주세요."

"......"

"학기가 끝나면 미국으로 가신다는 이야기, 저도 교장 선생님께 들었습니다. 그 곳에 가시더라도 늘 건강하세요, 김 선생님. 건너편 양동 국민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양숙이가 제 친조카입니다, 박양숙이. 선생님과 대학 동기라고 하더만요.”

김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 수업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다가 뒤로 돌아서서 안경을 살짝 벗었다.


아섭이가 교실 맨 뒤에 있던 책상 한 개를 끌어 왔고, 찬우는 그 위에다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독일 제과라는 글자가 잘 보이도록 상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양초 한 개를 케이크 위에 꽂은 서무 과장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현광이와 아섭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김 선생님은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는 촛불 앞에서 선생님의 눈은 전에 없이 반짝였다.


찬우가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으응?"

"아섭이가 축하 노래를 부르고 싶답니더."

졸지에 초대 가수가 되어버린 아섭이가 등을 떠밀렸다. 표정에는 '내가 언제'라는 물음이 묻어 있었다.

“그래, 선생님도 아섭이 노래가 듣고 싶네?"

모두 박수를 치며 아섭이를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아섭이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서무 과장과 선생님의 눈치를 잠시 살피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섭이가 교단 위로 올라섰다. 후욱 하는 결심의 한숨과 함께 아섭이는 눈을 질끈 감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부를 노래는, 우리 어린이들, 아니 참, 우리 김명숙 선생님이 너무나 좋아하는, 윤수일의 아, 파, 트입니다. 에잇, 빰빰빰 빠바바바밤.”

입으로 뱉는 반주에 맞춰 아섭이는 갑자기 개다리 춤을 추기 시작했다. 쪼로로 달려나가 옆으로 나란히 선 현광이는 양손으로 이마를 연신 쓸어 올리는, 또다른 춤을 선보였다.

“임마, 너거는 선생님 송별회에 그딴 걸 부르나, 아이고, 창피해서 못 살겠다.”

병철이는 돌아서서 제 가슴을 쳐댔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좋았다. 김 선생님도, 병철이도, 찬우도, 서무 과장도 아섭이와 현광이의 노래에 맞추어 즐겁게 손뼉을 쳤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햇볕이 좋았던 오후, 모두의 웃음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마지막 이야기가 내일 이어집니다)



* Image by Melanie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