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 운동화 어딨노?”
“아섭아, 빨랫줄에 너그 아버지 양말 좀 걷어 온나. 다 말랐는지 보고, 안 말랐어도 갖꼬 온나.”
"여보, 내 와이셔츠 없는데?"
“저기예, 아섭이 아버지. 흰 봉투 챙깄어예?”
“아침부터 와 이래 정신이 없노? 진섭아, 지금 몇 시고?”
정신없이 바쁘기는 병철이네도 마찬가지였다.
“보소, 병철이 엄마요. 민희 코 좀 닦아 주소. 저기 머꼬?”
“아이고 참내, 콧물은 당신이 좀 닦아 주믄 되잖아요. 바빠 죽겠구먼.”
“엄마, 내 바지는? 양말은 어데 있노?”
“니가 신고 있잖아. 병철이 아버지, 여기 있던 내 버선, 우쨌어요?”
“저거, 저거 봐라, 민희 코, 민희 코가 입으로 들어간다. 에헤이!”
일찌감치 준비를 서둘렀던 현광이 아버지는 시계를 힐끗 본 다음,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그 소리를 듣고서 현광이가 운동화 뒤축에 손가락을 넣은 채 한쪽 발로 뛰어나왔다.
“휴우, 찬우 아버지가 장가 가는데 왜 우리가 더 바쁘노?”
마당으로 내려선 현광이 어머니가 한복 치마를 야무지게 휘감았다. 대문을 걸어 잠근 아버지는 현자를 번쩍 들어 오토바이 맨 앞에 앉혔다. 그 뒤로 아버지, 또 그 뒤에 어머니, 맨 끝 짐받이에는 현광이. 이렇게 현광이네 네 식구가 한 대의 오토바이 위에 줄줄이 올라탔다.
“고급 자가용이 따로 있나? 장복태 기사의 멋진 오토바이, 이제 출바알!”
네 식구를 태운 오토바이는 힘에 겨운 듯 발발거리며 골목을 벗어났다.
12월이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딱 기분좋을만큼의 쌀쌀함이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복이 아버지는 교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저씨, 그동안 잘 계셨어요?”
누군가의 인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명수였다.
“아이고, 이기 누고? 명수 아이가. 언제 왔노? 치료는 받을 만 하더나?”
반가운 마음에 진복이 아버지가 명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뒤로 현수네 가족과 명기가 걸어왔다.
“어제 오후에 휴가 받아서 잠시 나왔어요.”
“휴가? 병원도 휴가가 있나? 어쨌든간에 참 잘 왔다, 암."
“특별 휴가란 게 있지요. 내 정도 파워가 되믄. 험험.”
갑자기 끼어든 택모 아버지는 뜬금없이 계급장의 먼지를 터는 시늉을 했다.
“근데 행님은 와 여기서 담배를 피웁니까? 경찰한테 벌금 한 번 맞아 볼랍니꺼?”
“학교 안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되니까 교문 밖에서 핀다 아이가? 선 안 넘어갔다. 그래도 벌금이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만담을 현수 어머니가 애써 끊었다.
“아저씨들, 농담 고만하고 빨리 가입시더. 앞 자리에 앉아야 신부 얼굴을 잘 볼 수 있습니더.”
강당 입구에는 교장 선생님의 이름이 적힌 화분과 함께 크고 작은 화환들이 줄을 지었다. 몇몇 어른들은 화환의 띠에 적힌 이름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섭이 가족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 마침 병철이가 헐레벌떡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손에는 구두 한 켤레가 들려 있었다.
“병철아, 어데를 그렇게 급히 가노?”
아섭이가 병철이의 팔을 낚아챘다.
“큰일 났다. 우리 아버지가 결혼식 사회 보는데 깜빡하고 구두를 안 닦았단다.”
“사회자가 구두를 머 할라꼬 닦노? 어데 너거 아버지가 장가 가나? 휴지로 그냥 대충 닦아 드리라.”
“맞제?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아버지가 한사코 고집을 부린다. 퍼뜩 집에 가서 닦아 와야된다. 빨리 다녀 올 테니까 좋은 자리 맡아놔라, 알겠제?”
"그, 그래."
그때 어디선가 큰소리가 들려왔다.
"야, 병철아! 그런 거라면 집에 안 가도 된다."
병철이와 아섭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말쑥한 옷차림의 보선이가 서 있었다.
“와아, 보선이 아이가. 니가 여기 우짠 일이고?”
아섭이의 물음에 보선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웃었다.
“이런 날은 우리한테 대목이다.”
“대목?”
보선이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보선이의 등 뒤로 학교 담장 아래에 줄지어 앉은 구두닦이들 서넛이 보였다. 그들은 이미 한 켤레 씩의 구두를 맡고 있었다.
"우와아, 대단하네."
그때 현광이가 계단 아래에서 뜀걸음으로 올라왔다.
“보선아, 억수로 오랜만이네. 오늘, 좋은 옷 입었네?”
보선이를 본 현광이가 손을 쑥 내밀었다. 보선이가 그 손을 맞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근데 누고, 저 구두닦이들은?”
보선이의 귀에다 대고 나지막이 물었다.
“내랑 같이 일하는 형들이다. 그라고 병철아, 그 구두, 나한테 주라.”
"으응?"
빼앗다시피 구두를 받아 든 보선이는 잽싸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보선이가 돌아왔을 때 담장 아래의 형 하나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엉겁결에 꾸벅 인사를 했다.
"보선이 니한테 신세를 지네."
병철이가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신세는 무슨. 우리는, 친구 아이가."
보선이는 아섭이와 병철이의 어깨에다 팔을 걸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교탁 앞에 선 병철이 아버지가 마이크를 툭툭 건드렸다. 단상 오른쪽의 커다란 피아노 앞에는 김명숙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우와, 우리 선생님이 피아노 치시기로 했나?”
“원래는 수아가 하기로 했는데 선생님이 이민 가시기 전에 수아랑 찬우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직접 연주해 주신다고 했다더라.”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은 반장 영감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돋보기를 꼈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교탁에 새겨져 있는 학교 이름을 보며 아섭이가 킥킥거렸다.
“나중에 사진 찍으면 동명 예식장이라 해도 되겠다. 쥑이네.”
그러는 동안 동네 사람들과 하객들이 속속 강당으로 들어와 빈자리를 채웠다.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대하던 동네 사람들이지만, 말쑥한 옷차림으로 학교 강당에서 만나게 되니 조금은 어색한 기분마저 들었다. 몇몇 어른들은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마치 수 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했다. 내년이면 이 학교에 다니게 될 동네 꼬맹이들은 어른들 사이로, 의자 사이로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근데 아섭아, 찬우는 어딨노?”
“저 앞에 앉아있다 아이가. 이수아랑 나란히.”
현광이가 목을 뽑아 앞을 기웃거렸다.
“와아, 이수아, 진짜 예쁘네.”
“수아 엄마가 저 원피스를 직접 만들어 줐다 하더라.”
“와아. 진짜 대단하데이.”
“그뿐만이 아니다. 찬우가 입고 있는 저 골덴 양복도 수아 엄마가 사 줐다 하더라. 김민재 아동복인데 억수로 비싸다 하더라.”
떼를 지어 몰려온 같은 반 아이들이 찬우와 수아를 보며 부러운 듯 떠들어댔다.
“얘들아, 나는 오늘 결심했다.”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며 아섭이가 말했다.
“무슨 결심?”
병철이가 아섭이의 주먹을 양손으로 살짝 덮었다.
“나는 나중에 크면 반드시 이수아한테 장가갈 거다.”
"......"
“에, 또, 마, 장내를 가득 메워주신 하객 친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병철이 아버지가 인사와 함께 마이크 옆으로 비껴 서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에, 또, 신랑 강상현 군과 신부 임혜원 양의 성스러운 결혼식을 맞이하여 이처럼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에, 오늘의 주례는,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신 23통 1반 반장님, 제철만 반장님께서 맡아 주시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한 반장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뜬금없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장은 곧 단상 아래의 하객들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에, 참고로 반장님께서 입고 계신 저 양복은, 학교 앞 진복 세탁소 사장이신 진복이 아버지, 김돌석 사장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손수, 직접 다려주셨습니다.”
병철이 아버지의 농담에 사람들이 또 한 번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리고 반장님이 신고 계신 구두는, 동래 구청 똘똘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우리 아들 계병철이의 친구 서보선 군이 물광을 내어 닦아 주었습니다.”
난데없는 호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보선이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아, 부끄럽다.”
창피하다며 보선이가 고개를 숙였지만 그리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예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의 주인공, 신랑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맞잡은 손을 절대로 놓지 않고 평생을 함께 가겠다는 뜻으로, 오늘은 신랑 신부가 동시에 입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의 앞날을 밝혀 줄 길잡이로는, 강상현군의 아들 찬우 군과 임혜원 양의 딸 수아 양이 맡아 주겠습니다. 자, 그러면 힘찬 박수를 부탁드리면서, 신랑 신부... 입장!”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찬우와 수아가 앞장을 서고, 찬우 아빠와 수아 엄마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또다시 박수 소리가 강당에 가득 울렸다.
“수아야.”
꽃바구니를 들고 앞장서서 걸어가던 찬우가 박수 소리에 묻힐 것을 염려했는지 제법 크게 수아를 불렀다.
“왜?”
“너거 엄마, 진짜 예쁘다.”
“그럼 나는?”
“......”
주례사를 낭독할 차례였다. 반장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눈과 비로 시작해 검은 머리, 파뿌리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반장의 길고 긴 주례사가 끝나고 병철이 아버지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제철만 반장님의 훌륭하신 주례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생활화하시기 바랍니다.”
사회를 보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아버지를 병철이는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옆에서 현광이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거 아버지, 억수로 멋지다. 확실히 친부모 맞다."
“에, 다음 순서는 오늘의 결혼식을 빛내기 위한 축가입니다. 오늘의 축가는...”
사람들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축가를 부르는지 볼 작정이었다.
“오늘의 축가는, 얼마 전까지 마산에 계시다가 최근에 우리 동네, 우리 동네하고도 독일 제과 옆으로 사업장을 옮기신 명희 식당 박춘복 사장님의 장녀, 선영 양이 불러 주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동네의 자랑인 선영 양은 이번에 부산 최고의 명문, 경남 여자 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선영 양에게도 축하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강당이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에 선영이가 인사를 했다. 그 옆에 앉았던 명희도 덩달아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 보였다.
“박선영 양이 불러 주실 축가는...... 음, 누가 이걸 영어로 써 놨노? 에이 모르겠다. 선영아, 그냥 불러주라.”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단상에 오른 선영이가 마이크 앞에 섰다. 명희 어머니는 선영이를 보면서 옆에 앉은 명희 할머니 몰래 눈물을 닦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다음 가볍게 눈짓을 하자 김명숙 선생님이 부드럽게 첫 건반을 눌렀다. 맑고 고운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영이가 노래를 시작했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은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
깊은 밤에도 잠 못 들고 그대 모습만 떠올라
사랑은 이렇게 말없이 와서 내 온 마음을 사로잡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선영이의 노래를 들었다.
찬우 아버지는 수아 어머니의 눈물을 살짝 닦아 주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수아도 찬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찬우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명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한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학교를 빠져나갔다. 아이들과 함께 뒷정리를 마친 서무 과장은 커튼을 모두 내린 다음 강당의 문을 자물쇠로 굳게 잠갔다. 철컹 소리가 났다.
"배가 터질라 한다. 이젠 공짜로 줘도 더 못 먹겠다. 꺼어억."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섭이는 개구리처럼 볼록해진 배를 두드리며 연신 트림을 해댔다. 예상치도 못했던 진수성찬에 모두들 전에 없던 포만감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교문을 지날 즈음에 현광이가 갑자기 멈춰 섰다.
“병철아."
"왜?"
"그러고 보니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아이가? 니는 무슨 선물 받고 싶노?”
병철이는 갑자기 풀이 죽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선물은 무슨... 우리 아버지랑 아섭이 아버지랑 행님, 동생 하면서 내려갔는데 오늘 안으로 집에 오기 힘들지 싶다. 현광아, 니는?”
현광이도 바닥의 돌을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마찬가지다. 너거 아버지들이랑 루돌프 노래 부른 사람이 우리 집 산타 클로스다. 오늘 절대로 집에 안 온다. 장담한다."
"우리는 와 이리 불쌍하노? 크리스마스에 선물도 못 받고... 간만에 공이나 차러 갈래?”
아섭이와 병철이는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현광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찬우야.”
아섭이가 고개를 돌려 찬우를 불렀다. 찬우는 몇 걸음 뒤에서 아이들을 따라 걷던 참이었다.
“어, 왜?”
“니는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노? 아까부터 혼자 실실 웃으면서...”
현광이도 감았던 팔을 풀고 찬우를 돌아보았다.
찬우는 대답은 않고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섭이가 따라했다. 코끝이 조금 시렸지만 상쾌한 겨울 공기가 코로 한가득 들어왔다. 고개를 든 채로 찬우가 물었다.
“너거 말이다, 영산홍 아나?”
“영산홍?”
“알지.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노?"
"봄이면 학교 뒷산에 천지로 피는 게 영산홍 아이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찬우가 다시 물었다.
“그라모 말이다. 너거, 영산홍의 꽃말은 뭔지 아나?”
“영산홍 꽃말?”
"......"
이번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찬우가 아이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영산홍의 꽃말이 뭔가 하면 말이다, 그건 바로 첫사랑이라 카드라.”
"머라꼬, 첫사랑?"
"영산홍 꽃말이 첫사랑이라고?"
"응."
"멋지네? 근데 찬우야, 뜬금없이 영산홍 꽃말은 왜? 머할라꼬?"
"오래 전에 나한테 그걸 아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거든. 그 사람이 오늘 정답을 알려주더라."
"찬우 니가 그 사람의 첫사랑이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까 이상하게도 기분이 참 좋다. 첫사랑, 첫사랑......"
"첫사랑, 조오치."
"쳇, 현광이 니가 첫사랑을 아나?"
"병철이 니, 내 무시하나?"
"찬우 첫사랑은 이수아 아이가?"
"웃기지 마라. 박명희가 들으면 억수로 섭섭해 할끼다, 병철아."
"이제 박명희 경쟁자는 없어졌잖아?"
"박명희는 너거끼리 알아서 하고, 중요한 건 이수아다. 이수아는 바로 나, 손아섭 님의 첫사랑이다. 절대로 아무도 넘보지 마라, 알겠나?"
"천만에. 아섭이 니가 누구한테 장가갈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누군데?"
"우리반 천하장사 화영이!"
그 말과 함께 현광이가 아섭이의 뒷통수를 냅다 갈기고는 저 앞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아이쿠, 현광이 니 죽는다? 거기 안 서나?"
한 손을 머리에 댄 채 아섭이는 현광이를 쫓아 달음박질을 했다. 병철이는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찬우를 힐끗 보았다.
"찬우야, 있다 아이가. 니, 혹시 그거 아나?"
"뭐를?"
병철이가 슬금슬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우리 중... 달리기 꼴찌가... 화영이 신랑된데이!"
"머, 머라꼬?"
궁둥이를 쭉 빼고 정신없이 뛰어가는 병철이의 뒷모습에 찬우는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꼴찌를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멩이를 던져도 닿지 않을 거리에 아이들이 멈춰섰다. 병철이가 찬우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찬우야아, 니는 참 좋겠다아. 새 엄마가아 생겨서어!"
"예쁜 수아도오 새 식구가아 되어서어!"
아섭이와 현광이도 덩달아 옆에서 거들었다.
여전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찬우는 손을 둥글게 말아 나팔을 만들어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힘껏 외쳤다.
"야아! 병철아아, 현광아아, 아섭아아, 우리이, 오래오래애 친구하자아. 죽을 때까지이, 알겠제에?"
우렁찬 찬우의 목소리가 푸른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영산홍 일기 끝
* Image by Jaesung An from Pixabay / Excerpts from the photo collection of the Seoul Metropolitan Office of Edu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