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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Apr 19. 2021

포르노의 추억

사랑도 명예도 기억도 남김없이


등이 켜진 실내는 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변두리 다방에나 있을 법한 빨간색 레자 소파가 하나둘 짝을 지어 한쪽 방향으로 다닥다닥 붙었다. 어림잡아도 사십 개는 더 되어 보였다. 의자 등받이에 붙은 코딱지만한 탁자에는, 먹다 남은 컵라면, 꽁초 수북한 재떨이, 그리고 음료수 캔이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이런 지저분한 난장판이었음을 아까 들어올 땐 몰랐다. 앞자리에서 연신 가래침을 뱉어대던 빨간 점퍼 아저씨가 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 좋은 거 시작합니데이. 불 끕니다. 빨리 앉으이소.”


누군가의 말에 미처 볼일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옆에 앉은 종덕이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자, 인제 시작한다. 니가 기다리던, 그거 할 차례다. 히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곧 실내등이 꺼졌다. 앞에 놓인 큰 텔레비전 화면이 칙칙 소리와 함께 검은 바탕으로 바뀌더니, FBI WARNING이라는 글자 아래로 몇 줄의 영어가 잠시 보였다.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종덕이가 사타구니를 스윽 훔쳐 올리는 것이 얼핏 보였다.


잠시 후, 푸른 하늘에서부터 커다란 나무를 타고 내려온 카메라의 시선이 천천히 무언가로 좁혀졌다. 시선의 끝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나,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한 사람은 엄청나게 큰 가슴이 달린 여자였고 또 한 사람은 역시 엄청나게 큰 성기가 달린 남자였다. 그들은 그렇게 벌거벗은 채, 서로의 손을 잡고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1987년 봄,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신흥 명문고교라는 별명에 걸맞게, 학교는 일요일에도 교실을 개방해서 학생들의 자습을 독려했다. 선생님들도 당직 순서와 관계없이 학생들의 공부를 도왔다. 한 반에 대략 스무 명 정도가 일요일을 평일처럼 보냈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굳이 갑갑한 독서실을 돈까지 써가며 다닐 필요는 없었다.


소매를 걷어 올려야 하는 유월이 되었다. 역시 그날도 일요일이었다. 성문기본영어를 꺼내려는데 우리 반 종덕이가 슬그머니 내 옆자리에 앉는다.


제이야, 좋은 거 보러 갈래?

좋은 거? 뭐?

뽀르노 말이다, 뽀르노.

뭐어, 뽀르노오?

그래, 뽀르노. 뭘 그리 놀라노? 혹시 니 뽀르노 한 번도 안 본 거 아이가?

미친나, 뽀르노 안 본 사람이 어딨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열일곱 살이 되도록 포르노를 본 적이 없었다.


여섯 살 터울의 누나와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고, 심지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구는 단칸방에 살았다. 하물며 내가 다닌 중학교도 남녀 공학이었다. 간혹 별난 아이들끼리 플레이보이 잡지를 돌려봤다거나, 부모님 외출한 동안에 빨간 테이프를 봤다는 말은 들었어도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그저 범생이 같은 내게 그런 걸 권하는 아이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러던 차에 뜬금없이 종덕이가 내게 달콤한 도발을 해 온 것이다.


퍼뜩 가서 한 프로만 땡기고 와서 열심히 공부하자.


그 날 내가 왜 종덕이를 따라나섰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이미 버스에서 내린 다음이었다. 종덕이는 의기양양하게 앞장섰다. 정류장에서 몇 걸음 되지 않은 곳에 작은 간판이 보였다. ‘칠백냥’. 입장료가 칠백 원이라더니 그래서 칠백 냥인가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종덕이를 따라 좁디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두꺼운 유리문을 열자, 자욱한 담배 연기와 퀴퀴한 냄새가 튀어나왔다. 코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연기와 냄새 속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종덕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 손에게 돈을 건넸고, 정신을 못 차리는 나를 흔들어 입장료를 내게 했다. 제대로 분간이 되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종덕이 옷자락을 잡고 아무 데나 겨우 걸터앉았다. 곧 우리 앞에 두 잔의 주스가 놓였다. 입장료를 내면 기본으로 음료수를 주는 것 같았다.


한쪽 벽으로 커다란 화면이 보였다. 중국 영화가 한참 상영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종덕이를 흔들었다. “야, 포르노 한다더만 무슨 중국 영화를 하노? 속은 거 아이가?” 종덕이가 피식 웃었다. “일반 영화 한 개 하고, 포르노 하고, 그렇게 한다. 쫌 기다리봐라.”


화면 속에서는 아주 예쁘게 생긴 선녀와 장국영이 서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음료수 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 시원하지도, 달지도 않은 아주 괴상한 맛이었다. 교실에 두고 온 성문기본영어가 생각났다. 미처 다 풀지 못한 영어 문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방 안의 도시락도 떠올랐다. 아버지, 엄마 얼굴도 잠시 스쳤던 것 같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켜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랬다.


“변소 가실 분 빨리 갔다 오이소. 5분 있다가 좋은 거 합니데이.”




발가벗은 남녀가 깔깔거리며 풀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엄청나게 큰 가슴도 덜렁거렸고, 엄청나게 큰 성기도 덜렁거렸다. 얼추 오 분 동안 그렇게 달리는 장면만 나왔다. “그만 뛰고 빨리 해라, 이것들아.”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말에 다들 킥킥거렸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 그만 달려라. 너희들 달리기하는 거 보러 온 것 아니잖니.


우리말을 들었던 걸까? 한참을 달리던 남녀가 갑자기 풀밭에 드러누웠다. 남자가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어보더니 입술을 포개며 한 손으로는 여자의 몸을 더듬었다. 카메라가 그 손을 따라다녔다. 여기저기서 끄응 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남자가 여자 위로 올라갔다. 나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드디어, 드디어. 하, 하는구나. 이게 말로만 듣던 포르노구나. 화면을 좀 더 잘 보려고 허리를 곧추 세우려던, 바로 그때였다.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욕설이 따라왔다.


“죽고 싶어? 감히 도망을 쳐? 이 새끼들아! 빨리 불 안 켜?”


차라리 불을 켜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듯 했다. 아이쿠야. 이거 뭐고. 고개 숙여, 이 새끼야!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퍽 퍽 퍽, 소리가 났다. 누군가 얻어맞는 모양이었다. 어디를 도망쳐, 이 새끼야. 대가리 박아! 큰 싸움이라도 난 걸까? 하지만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컵라면 국물이 사방으로 튀고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재떨이가 공중에 날면서 여기저기에 담배 국물을 뿌렸다.


정신을 못 차리던 중에 갑자기 또 치익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연기가 화악 피어올랐다. 눈알을 후벼파는 매캐한 냄새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곧 눈물 콧물이 정신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대략 5년 후 논산 훈련소에서 다시 경험하게 될 바로 그것이었다. 아이고, 종덕아. 이게 무슨 일이고.


종덕이는 이미 눈과 코를 틀어막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저러다간 종덕이가 죽겠다 싶어 손을 뻗으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밟았다.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청자켓과 청바지가 얼핏 보였다. 그들의 손에 들린 굵은 몽둥이도 보였다. 그리고 머리에 쓴 하얀색 화이바가 눈에 들어왔다. 내 어깨를 밟고 선 화이바가 그랬다.


“너, 죽었어. 이 새끼. 비싼 밥 처먹고 어디서 데모질이야?”


아, 아닌데요. 아저씨. 저는 데모가 아니라, 포, 포르노 보러. 그러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입 밖으로 나와서도 안될 말이었다.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 나오는데 저만치 텔레비전이 보였다. 벌거벗은 남녀가 또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바이바이, 그래, 잘 있어. 다음에 또 만나자.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1987년 유월이 그렇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경찰서에서 풀려난 것은 그 날 오후, 한참 늦은 시각이었다. 당시 부산의 유력 일간지 편집국장이었던 종덕이 아버지가 담당 경찰과 꽤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난 다음이었다. 고등학생이 어떻게 데모를 하겠느냐, 오해다. 아니다, 현장에서 잡혔다. 하부 조직까지 발본색원해야 한다. 대충 그런 말이 오갔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날 내가 난생처음 본 포르노보다 더 놀랐던 것은, 난생처음 보는 종덕이의 당당한 태도였다.


조사를 받을 차례에 맞춰 자기 아버지가 형사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종덕이가 갑자기 큰소리를 냈다.


“나라가 이 모양인데 고등학생이라고 참을 수 있겠습니꺼? 지금 나를 풀어주면 삼 년 후 대학생이 되어서 다시 여기에 올 낍니더. 두고 보이소.” 그러면서 녀석이 갑자기 팔을 휘저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아라앙도 며엉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아.”


그 때 종덕이 아버지가 뒤통수를 때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 노래를 끝까지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슬픈 곡조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경찰이 물었다. “저놈은 그렇다 치고 니는 부산대 앞에 뭐하러 갔노?” 뭐라고 해야할지 우물쭈물하는데 종덕이가 홱 말을 가로챘다.


“이 친구는, 저의 정신적 지주입니더.”


그 말에 경찰도, 종덕이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할 말을 잃었다. 종덕이는, 겁 많은 공범의 순순한 자백을 철저히 막고 싶었던 거다.




혹시나 ‘민증에 빨간 줄 그어진 것’ 아니냐며 부모님은 꽤나 걱정을 하셨다. 하지만 대학생 누나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오히려 민주 의식이 깨어있는 내가 자랑스럽다고까지 했다. 누나 미안해. 포르노 보러 갔다가 백골단에 잡혀간 거야. 하지만 그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나를 좋게 보셨던 담임 강영린 선생님의 배려로 다행히 학교에서도 별다른 처벌은 없었다. 다시는 데모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는 것으로 끝이 났다. 대신, 종덕이와 나는 사흘 동안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청소를 하는 내내, 종덕이는 투덜거렸다. 조금만 일찍 갔더라면 포르노를 다 본 다음에 잡혀갔을 거라는 거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2002년 가을, 나는 결혼을 했고, 담임 강영린 선생님께서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 주셨다. 선생님의 주례사가 그런데 나를 또 당황하게 만들었다. 주례사를 듣는 내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신랑 임군은 정의감이 투철한 청년입니다. 일찍이 고등학교 일 학년,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여 조국의 민주화에 직접 앞장섰으며…”


신랑 신부 행진을 하는데 저만치 하객 가운데서 종덕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서둘러 녀석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종덕이가 나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순간, 그 날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웃고 있던 그 벌거벗은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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