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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Apr 30. 2021

돈까스의 추억

밥으로 드릴까요, 빵으로 드릴까요


"우리, 맛있는 거 묵으러 갈래?"


달려온 어린이들, 손뼉 치며 함께 본다는 어린이 명작 동화에 넋을 잃고 있던 나와 여동생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마자 두말 않고 후다닥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손에 물을 묻혀 코를 푸는 것으로 동생의 세수를 대충 끝낸 아버지는, 내 옷의 지퍼를 턱밑까지 올리며 그러셨다.


"억수로 맛있다 카더라. 궁금하제?"


아버지의 손을 잡은 여섯 살 동생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찬바람에도 아랑곳없이 깨춤을 추며 폴짝폴짝 뛰었고, 나는 무엇을 먹게 될지 대충 짐작을 했지만 ‘억수로 맛있다’는 아버지의 호언장담에, 역시 전에 없던 기대를 했다. 오늘은 반드시 곱빼기를 먹어야지. 군만두도 당연히 시켜주시겠지? 구수한 짜장 냄새가 벌써부터 내 코를 간지럽혔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버지가 우리 남매를 데려간 곳은 지금의 연산동 신리 삼거리, 부산 은행 몇 걸음 아래에 있는 가게 앞이었다. 그것은 대명반점이나 중화루, 하다못해 밀양 분식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노란 간판에는 내가 미처 그 뜻을 모르는 글자가 하니 적혀 있었다.


 - 달과 육 펜스 -


내가 아는 말이라곤 오직 , 그리고  밖에 없었다. 아버지, 펜스가 뭔데예? 아버지는 대답 없이 달을 잡고 육펜스를 힘껏 밀었다. 처음 맡아보는, 꽤나 야릇한 냄새가 화악 밀려 나왔다.


아버지는 한쪽 구석 자리에 우리 남매를 우선 앉혔다. 그러자 천장에 닿을 듯 기둥처럼 높이 솟은 하얀 모자를 쓴 아저씨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돈까스, 두 개 주이소."


사람은 세 명인데 왜 두 개냐고 아저씨가 물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눈짓으로 동생을 가리키며, 얘는 아직 어리다 아입니꺼. 혼자서 한 개 다 못 묵습니더, 라는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아저씨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밥으로 드릴까예, 빵으로 드릴까예?"


아버지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아저씨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예. 밥이나 빵 말고 돈까스 주이소, 돈까스! 두 개."


아버지가 손가락 두 개까지 펴 보이자 아저씨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저 쪽으로 사라졌다. 어린 동생은 양손에 숟가락과 포크를 쥐어 들고 테이블을 톡톡 쳐가며 아까보다도 더 신이 났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가게 안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짜장면, 짬뽕, 만두는 익히 알고 있지만 무슨 까스, 무슨 까스 하며 벽에 줄줄이 붙어있는 낯선 메뉴는 그래서 나를 조금은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주문한 것은 돈까스. 돈까스 칠백 원. 짜장면은 오백 원인데 조금 더 비싸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둥 모자 아저씨가 다시 왔다


아저씨가 우리 앞에 내려놓은 것은 하얀 접시에 담긴 노란 국물이었다. 희한한 냄새가 났다.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까만 소금을 뿌려 주셨습니다 (사진출처 : 구글 이미지)


냅다 숟가락부터 담그려는 동생을 아버지가 만류했다.


"돈까스랑 같이 묵어야지."


잠시 후 하얀 기둥이 또 왔다. 이번에는 제법 넓은 접시였다. 거기에는 희끄무레한 것에 버무려진 옥수수와 구멍 뚫린 국수 조각(마카로니), 양배추, 단무지 조각 몇 개, 쌀밥 한 덩어리, 그리고 손바닥만 한 갈색 떡 같은 것이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전해오는 냄새 또한 처음이었다. 아, 이게 복만이 녀석이 먹어봤다고 더럽게 자랑하던 돈까스란 것이구나.


이것을 어떻게 먹어야 할 것인가?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곧 결단을 내리셨다. 아버지는 숟가락으로 밥을 푹 떠서 그것을 노란 국물에 담그셨다. 그리고는 그것을 톡톡 다져서 우리가 먹기 편하도록 말아 주셨다. 동생이 먼저 한 입을 받아먹었다. 그런데 오물거리던 동생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아빠, 이상하다, 맛이."


역시 나도 그랬다. 뻑뻑한 국물에 밥을 말았더니 죽처럼 물컹거렸다. 그리고 느끼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신통찮은 반응에 아버지는 조금 당황하신 듯했다.


"맞나? 그럼 그거 그만 묵고 이거 묵자."


아버지가 이번에는 큰 접시를 당신의 앞으로 가져간 다음, 젓가락으로 갈색 떡의 한쪽을 누르고는 다른 손으로 칼을 놀려 그것을 잘게 잘랐다. 역시 동생에게 먼저 한 조각, 나에게 또 한 조각을 주셨다. 미끄덩한 것이 입 안에 들어왔다. 살짝 씹어보니 고기 같았다. 달짝지근했지만 조금 이상한 맛이었다.


"아빠, 맛없다. 퉤에."


동생이 두어 번 오물거리다가 그만 그것을 뱉어 버렸다. 가시나야, 그런다고 그것을 뱉나? 내가 화를 냈다. 버럭 소리에 동생이 갑자기 울먹울먹 했다. 맛없는데 우짜라고. 아버지가 동생을 애써 달랬다. 맛이 없기는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싸다고 더 맛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차라리 짜장면이나 사 주시지. 복만이 자식, 돈까스 맛있다고 자랑하더만 맛이 한 개도 없네.


희미한 갈색 추억, 아니 갈색 떡 (사진출처 : 구글 이미지)


그래도 나는 먹는 시늉이라도 했다. 난처해진 아버지는, 미처 국에 담그지 않은 흰밥만을 겨우 골라 단무지를 얹어 동생에게 먹이셨다. 아버지는 결국 우리가 남긴 두 개의 돈까스를, 표현이 죄송하지만, 꾸역꾸역 혼자 다 드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0년 겨울, 내가 처음으로 돈까스를 먹은, 아니 구경한 날이었다.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 역시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그리고는 크게 웃으신다.


"못 살았고, 잘 몰랐을 때 아이가. 맛있다고 해서, 얼라들이 좋아한다 말만 들었지. 태어나서 돈까스라는 걸 나도 처음 보는데, 어떻게 먹는지 우째 알겠노? 하물며 '수푸'라는 건, 말도 마라."


아버지의 그 말속에는 당신의 미안함이 담겨 있음을 나는 잘 안다.


당시 내 나이 아홉 살, 동생은 여섯 살, 그리고 아버지, 서른아홉이었다. 나중에 듣게 된 것이지만 그 해에 2차 석유 파동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며칠 째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 얻은 일자리라 해도 찬바람이 불면 건설 현장은 다음 날을 기약하지 못했다. 물이 얼어 시멘트를 개지 못하면, 시멘트가 굳지 않아 벽돌을 올리지 못하면, 결국 공사를 할 수 없었다. 공사를 할 수 없으면 날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날이 풀릴 때까지 공사를 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수입은, 없었다. 대신 어머니가 집 근처의 식당에 나가거나 남의 집 허드렛일을 거들거나, 아니면 집에서 밤늦도록 부업거리를 만져야 했다.


그것이 미안했던 아버지는 며칠 간의 당신의 담뱃값을 아껴 큰 맘먹고 우리 남매를 돈까스 가게에 데려가셨던 것이다. 세 개를 주문하기엔 돈이 모자랐던 것 같다. 당신도 경험한 바 없는 새로운 음식이었지만, 우리가 좋아할 모습만 상상하며 그저 즐거운 기대로 넘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 달리,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한 진수성찬을 눈 앞에 두고서 우리는 그저 맛없다 푸념을 해버린 것이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구멍가게에 들러 우리에게 호빵을 하나씩 사 주셨다. 나는 내 것을 먹지 않고 동생에게 주었다.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동생이 양손에 호빵을 들고 코를 벌름거리며 헤헤 웃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웃는, 그러나 슬픈 얼굴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객지 생활이 불효의 핑계가 되어버렸다. 평소보다 이른 점심을 마치면 가끔 전화를 드린다. 여든이 이미 넘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러나 언제나 유쾌하다.


"응, 내다. 점심 묵었나? 내도 경로당 친구들이랑 점심 묵으러 왔다. 뭐 묵냐고? 돈까스. 어느 식당? 달과 육 펜서, 우리 동네에 돈까스 가게가 거게 말고 또 있나? 그래, 끊자. 지금 수푸 나왔다."


전화를 끊고 나자 과연 아버지가 그 노란 국물을 이번에는 어떻게 하실지 살짝 궁금해졌다. 떠먹일 아이들이 이젠 없으니 적어도 그 국물에 밥을 말지는 않으실 거란 생각이 얼핏 들었다.


맞은편으로 옮겨 영업 중입니다. 가게 홍보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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