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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May 07. 2021

주례의 추억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선배님, 주례를 서 주십시오.”

“사회 말이지? 결혼식 사회.”

“아닙니다, 주례 맞습니다. 저희들 결혼식에 꼭! 주례를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정자貞慈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옆에 앉은 철현이도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서 간절함이 뚝뚝 떨어졌다. 난처했다. 주례라니, 고작 마흔 한 살인 내게 주례라니. 나는 대답 대신 잔을 들었다.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소주가 내게 투덜거렸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주례는 아니지!




“선배님, 19기 김 정자입니다. 소주 한 잔 사 주십시오.”


어느 날, 고교 후배 정자가 연락을 해 왔다. 내가 졸업하고 십오 년 즈음 지났을 때, 모교母校는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사회 생활을 하는 동문들과는 곧 자연스러워졌다. 진학과 취업 때문에 서울에서 생활하는 후배들이 많았다. 정자도 내가 서울에서 알게 된 여후배 중 하나였다.


정자는 대학에서 스포츠를 전공했고 스키 강사로도 활동했다. 운동을 해서인지 씩씩함이 남달랐다. 말투만 본다면, 오늘 아침 신병 휴가를 나온 이등병과 다를 바 없었다. 무조건 다, 나, 까 였다. 나는 내 아내처럼, 늘 씩씩하고 당찬 정자가 그래서 좋았다. 흔쾌히 약속을 정했다.


(내 일기를 근거로) 2011년 10월 8일 토요일 오후, 강남으로 나갔다. 나를 알아본 정자가 저만치서부터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는데, 웬 까무잡잡한 사내 하나가 역시 정자를 따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님, 이 쪽은 제 남자 친구입니다. 결혼할 사람입니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저는 임철현입니다.”


하긴 여자 친구의 선배니까 나를 선배라 불러도 되겠지. 그런데 말을 놓아도 되나, 잠깐 망설이는데 악수를 하는 철현이의 손아귀 힘이 예사롭지 않다. 허억, 이 친구, 뭐지? 혹시 운동했나?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철현이는 현역 권투 선수란다.


근처 삼겹살 집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의 근황과 신변잡기를 나누며 잔이 두어 차례 돌던 즈음, 정자가 갑자기 그 말을 꺼낸 것이다. 선배님, 저희들의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 주십시오!




나는 두 사람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참이나 애를 써야 했다.


“정자야, 내가 네 선배지만, 이제 겨우 마흔이 넘었을 뿐이야. 그런데 내가 주례를 선다고? 안 된다. 그냥 너의 지도 교수님이나 아니면 철현이 선배들도 많이 있을 것이니 그분들께 부탁드려 보렴. 주례라는 건, 인품이나 사회적 덕망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자가 갑자기 소주병을 들었다. 어, 어, 그래. 곧이어 철현이가 제 잔을 내게 권했다. 어, 어, 그래. 자, 잠깐만, 얘들아. 어허, 어어, 그, 그래. 일단 오늘은 편하게 술 마시자. 아무리 그래도 주례는 안 된다, 알겠지? 어, 어, 그래. 아니, 덜 마셨는데, 어, 그, 그래.


그 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완전히 취해 버린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겨우 눈을 떠보니 정자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선배님 잘 들어가셨습니까?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부탁? 무슨 부탁을 들어줘? 설마? 주례를? 이거 큰일 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내가 허리를 젖혀가며 웃었다. 내 속도 모르고 아내는 그저 놀려대기만 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어른들도 허락하신 거라며? 그나저나 마흔에 주례라니, 노안老顔도 서글픈데 주례라니. 마흔 살에 주례라니! 하하하하.”


엎질러진 물이었다. 결국 나는 두 사람을 서너 번 더 만났고, 그중 한 번은 아내도 동행해서 철현이와 정자에게 미리 준비할 것과 각자 챙길 것들을 알려 주었다. 언니가 없는 정자는, 눈을 반짝거리며 아내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취했다.




2011년 11월 6일 토요일,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장소는 용산 한국전쟁기념관이었다. 양가 모두 첫 혼례였던 탓에 하객이 많았다. 운동선수 커플이어서인지, 하객들의 면면도 흡사 태릉 선수촌을 옮겨온 것 같았다.


예식을 준비하던 중에 알게 되었다. 정자의 시아버지 되실 분은 한쪽 몸을 쓰지 못하셨고, 신랑의 동생은 자폐증이 있다고 했다. 물론 정자가 응당 헤쳐가야 할 인생의 숙제겠으나 마치 친동생을 시집보내는 기분이 들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지금은, 두 분 모두 많이 호전되셨다고 한다)


그 날의 결혼식에서는 내가 사회도 보고 주례도 맡았다. 다만, 주례사만큼은 내가 하지 않고,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시詩를 낭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시는 내가 골랐다. 맞다. 주최 측의 농간이다. 축가는 유명 가수가 왔다. 음 이탈이 있었던 것은 비밀이다. 축하와 박수와 눈물과 함성과 그리고 감사의 말로 철현이와 정자의 결혼식은 잘 마무리되었다. 또한 내 인생의 첫 주례도 그렇게 잘 끝났다.




봄이 되니 청첩請牒이 날아온다.


청첩을 받으면, 내가 주례를 섰던 그 날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당장에라도 숨고 싶은 장면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나, 검은 머리 한 세트를 일심동체 파뿌리로 만드는 소중한 순간에 나름의 역할을 했음은 지금 생각해봐도 가슴 뿌듯한 일이다.


정자와 철현이는 귀여운 딸과 개구쟁이 아들과 여전히 오손도손 잘 산다. 그리고 서울 용두동에서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운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방문 가입을 권유해 본다. 당연히 내 이름을 팔아도 좋다. 주례 선생님의 소개로 왔다고 하면, 약간의 할인을 기대해도 좋을 일이다. 마흔 살의 나를 꽤나 당황하게 만들었던, 이 맹랑한 커플이 운영 중인 체육관의 이름은 바로,


중독된 복싱이다.


신랑 임 철현 군은 주례를 사랑합니까, 덜덜덜



Title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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