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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 허무주의에 맞서는 사실적면서도 환상적인 응원

영화 1화. 신카이 마코토,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by 제II제이

저세상에서 존재하던 어떤 원념이 이세상으로 비집고 나올 때,

그로 인해 일상이 파괴되고 폐허가 될 수 있다면?

지진같은 재난은 어쩌면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들로 보이지만,

정말 그럴까.

자연 현상은, 특히 그로 인한 재난이나 아픔은

우리의 일상에 포함이 될까, 되지 않을까.


신카이 마코토 작가의 애니메이션 작품

<스즈메의 문단속>의 세계관에서

과거의 것들, 저세상으로 간 것들은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 같다.


이 세상으로 넘어오며 파괴하는 염원 /

파괴적인 그것을 막아내는 힘의 근원


같은 것이지만 다르게 작용될 수 있는 것은

이세상의 것에 달렸다.



이 세상의 폐허에서 ‘뒷문’이 열린다.

열린 뒷문은 저세상과 통한다.

이 문을 통해 나오려는 것은

저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떤 힘.

끝없이 솟아오르기만은 하지 못하는

이 거대한 힘은 지상의 이끌림에 따라 떨어져 내리며

이 세상에 지진을 일으킨다.

거대한 지렁이와도 같은 이 것을 부르는 이름은

‘미미즈’이다.


이 문을 막을 수 있는 것도 폐허에 존재하던,

살아있던 것들의 목소리의 힘이다.

열쇠를 가진 자가 눈을 감고

이 땅에 있었던 목소리들을 떠올릴 때

뒷문을 닫을 수 있는 열쇠 구멍이 나타나게 된다.

주문을 외우며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돌릴 때

뒷문은 닫히고 미미즈가 사라지며 비가 내린다.

미미즈의 기운은 잠시 막을 수 있지만

계속 억누르려면 ‘요석’이 필요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요석’을

제자리에서 이탈시킨 스즈메의 모험 이야기다.




지나간 것(과거의 것, 죽은 것)은

원래 현재의 것(살아 있는 것)이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현재의 것, 살아 있는 것은

지나간 것(과거의 것), 죽은 것이라는 말이 된다.


스즈메가 과거에 엄마를 잃은 사건은

허무, 파괴의 힘이 될 수 있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저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간

저세상에서 만난 '내일의 스즈메'로 인해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저세상의 것이 파괴의 염원이 되지 않고

그것을 막아내는 힘으로 자라게 된다.


내일의 스즈메는

모험 내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미미즈를 막으며

소타와 함께하는 여정의 경험을 통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어떤 감각을 느끼는데,

이것이 생에 대한 절실함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현재와 현생에 대한 간절함을 갖게 된다.


이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 않을까.

고양이로 표현된 신(다이진)은

스즈메의 가족이 될 수 없다.

영원한 존재로서의 신은

일시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현재(현생)에 대한 간절함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인간(소타)를 도구로 사용하는,

어떤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스즈메의 관심을 끌어

스즈메의 마음을 얻으려는 다이진의 행동은

그래서 스즈메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스즈메의 가족이 되지 못했어”)

다시 요석으로 돌아가게 된다.




작중에 등장하는 스즈메에게

도움을 주는 인물들은 대개 따뜻하고,

특히 자신의 삶의 현장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보이는 따뜻함

(현생에 대한 애정과 충실함)이

스즈메의 여정에 도움이 된다는 점도

파괴적인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한 힘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세리자와가 7시간이 넘는 시간을 운전하며

소타를 찾으러 가는 모습 등등.


작품 후반

저세상으로 스즈메가 들어가는 장면에서

저세상은 불타는 폐허로 묘사되며,

계속해서 이세상을 파괴하려는 미미즈가

뒷문을 통해 빠져 나가려고 하는 상태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공존하는 그곳에서

내일의 스즈메가 과거의 스즈메를 달래는 모습은

스즈메와 소타가 요석을 통해 미미즈를 제어하며

저 세상도 마치 생명이 자라는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모습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스즈메와 소타는

“죽고 싶지 않아”라는 대사로

현재에 대한 절실한 애정을 보이는 인물로 정립되며

이를 통해 저 세상이 생명이 있는 공간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에 대한 관점이

지금의 인생들의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듯하다.




일본에서 지진은

일상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자연재해이다.

작중에서 작은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핸드폰에서 재난문자가 울리며

사람들이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지진의 피해 및 이로 인한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자연재해를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는 당연히 없겠지만,

그로인한 절망감을

어떤 관점에서 다룰 수 있을까에 대해,

작품은

지금까지 무수히 존재했다 사라진

‘생’이 가진 애틋함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생’에 대한 절실함으로,

인간이 미처 어찌할 수 없는 절망에

대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지 않을까 한다.




스즈메와 소타의 사랑의 감정은

좀 느닷없다는 느낌을 준다.

다이진의 존재는

‘제멋대로인 신’이라는 말로만 적당히 넘기기엔

좀 부족해보이고.

이런 점은 몰입에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까지 더 진지하게 다루려고 했다면

영화가 좀 어려워지지 않았을까.


다른 측면에서,

이 작품은 극사실주의 작화로

환상적인 세계관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느낌으로 그림들을 보게 되는데,

이것도 작가의 특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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