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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werzdx Nov 17. 2020

2014 부국제, 분절된 기억들

이사일기(2010-2020) - 7. 성산동 (2014.08)

영화제에 가는 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제에 가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취미이자 연례행사였다. 부산과 전주, 가끔은 부천과 충무로까지. 평소에는 영화관에 잘 가지 않는 내게 영화제는 그야말로 축제의 시간들이었다.


영화제를 통해 선보인 영화들 중 좋은 반응을 얻은 것들이 개봉한다. -> 개봉한 영화들 중 성공하는 영화들이 있다. -> 결국 극장에서 개봉하여 성공한 영화들을 보는 것이 종합적으로 좋은 영화를 선택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문화예술 관련 모든 분야, 단일 분야의 장르,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을 흥행과 대중적 인기 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제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만의 작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업적 성공에 눈이 멀어 덧씌워진 각종 광고와 판촉을 통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그 자체로. 물론 영화제에서도 '주목할 영화' 같은 게 있긴 하지만 영화에 무지한 나는 그 정도의 정보는 알아도 큰 무리가 없겠다.


   성산동 쉐어하우스에 살 때,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를 두 차례나 갔다. 일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첫 주말에 가고, 그 다음 주말에 또 가고. 남들이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무리 영화제에 가고 싶었던들 서울에서 4시간 반이나 걸리는 부산에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가다니.



   그땐 그래도 그럴 수 있는 열정과 체력이 있었으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할 때.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요동치지 않았을 때 나는 '이게 사는건가?' 하고 아주 작게 마음 속으로 되뇌였었다.


   영화제 기간 동안 두 번이나 부산을 찾았던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나의 메모를 뒤적여 보았다.



2014년의 부국제, 메모들


   2014년 10월 2일 - 버스는 5시간 반을 달려 부산의 모습을 허락했다. 노포동 터미널에서 아무도 없는 쓸쓸한 거리를 지나 범어사역에 도착했다. 어떻게든 이 지역의 음식점 맛을 보려했으나, 치킨집마저 영업의 종료를 알려왔고, 결국 전국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을 흡입한 뒤 범어사역 근처 찜질방에 왔다.


   처음 와보는 이곳에서 아는 누군가를 만나는 상상을 했다. 내일 아침 10시에 볼 '언어와의 작별'을 성공적으로 대하기 위해 지금의 나와 어서 작별해야 한다. 핸드폰 충전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나는 잘 수 있다.


2013년 비프빌리지에서 내가 본 바다 / 2014년 비프빌리지에서 내가 본 바다


   2014년 10월 3일 - 작년과 올해의 같은 날짜, 같은 시간의 비프빌리지. 다른 마음상태.


   2014년 10월 9일 - 해운대 포장마차촌에서 오늘 봤던 '그들이 죽었다' 감독님과 배우분들 우연히 발견하고 잘 봤다고 인사했더니 소맥 한 잔 얻어먹었다. 영화 정말 좋았습니다.


   2014년 10월 10일 - 1년에 볼 영화보다 더 많은 영화를 본 것 같은, 올해 부국제 내가 본 영화들. 나만의 평점.

테헤란의 낮과 밤 9.0 / 군중낙원 8.5 / 한여름의 판타지아 8.5 / 언어와의 작별 8.0 / 여름날 8.0 / 그들이 죽었다 7.5 / 타이페이의 꽃: 대만의 뉴웨이브를 말하다 7.5 / 순응 7.0 / 철원기행 7.0 / 한강블루스 7.0 / 기약없는 만남 6.5 / 더 컷 6.0 / 제로니모 6.0 / 오색신검 5.5


   2014년 10월 11일 - 영화인도 아닌데, 저번 주와 이번 주 2번이나 부산을 오가며 꼬박 5일 동안 머물렀다. 총 14편의 영화를 봤고, 정말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해운대와 센텀시티역에서 부산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 다음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들, 해운대 구남로에서 분절된 그 순간순간의 기억은 마치 영화 북촌방향에서 주인공이 마주하던 매일매일의 길들을 떠올리게 했다.


   하루 3편의 영화도 버거워 하던 내가 이번에는 하루 4편을 본 것도 이틀이나 되었다. 별로 졸지 않고 각각을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나이 서른셋에 집중력의 향상인가). 구남로에서 메가박스 방향으로 빠지는 길목에(무슨 은행건물과 다이소 사이) 그려져 있는 어린왕자 벽화들은 부산에서의 시간동안에 나를 되돌아보는 역할을 해주었다.


   밀양돼지국밥집과, 전통시장 초입에 있는 국밥집을 서너 번은 간 것 같다. 국밥, 밀면, 대구탕집을 제외하면 혼자 갈만 한 음식점이 많지 않다.


https://m.news.zum.com/articles/16598964


   해운대 바다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내가 그동안 가장 잘 찍은 사진이라 생각되는 것(작년 영화제 때 찍은 사진)을 찍은 그 자리에서 매일매일 찍어두었다. 날마다 느낌이 다르다. 기분이 달라서인지.


   부산에 간다고 하니 친구들은 내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다. 무조건 썸을 타고 와야 한다, 영화 다 필요 없고 혼자 온 여자를 만나야 한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나는 시도는 했다.


   3일 아주 늦은 밤에는 해운대 바다에서 우연히 같은 회사 여직원을 만났다. 4일에는 철원기행을 본 상영관에서 동네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5일 점심에는 약속했던 사람을 만났다. 9일과 10일에는 어떠한 만남이 없었다.


   친구들의 주문이었던 누군가와의 썸을 실행하기 위함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이끌려 말을 건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고독하려고 왔다'며 함께 뭔가 하길 거부했다. 5일에 서울로 돌아가는 '첫 번째' 길에 터미널에서 그녀를 우연히 다시 봤다. 다시 말을 걸지는 않았다.


   하루하루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 당신과 나의 삶도 연결되어 있다. 하루에 3~4편씩 본 모든 영화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매일매일, 순간마다 각자의 삶과 이야기를 만났고, 그것이 피곤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제가 내게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년의 전주영화제를 기다리겠다. 내게 행복감과 고민의 시간을 안겨준 타임테이블 안의 모든 활자들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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