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왕, 사자에게도 천적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사자의 천적은 바로 얼룩말입니다. 말도 안된다고요? 그러나 당신이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면 놀라운 교훈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악당에게 맞서야 하는 이유를, 악당에게 맞설 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천적
자, 그러면 얼룩말이 어째서 사자의 천적인지 알아봅시다. 천적이란 무엇인가요? 천적은 누가 더 강하고 약한가에 대한 개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자는 얼룩말보다 강하고 참새보다는 훨씬 강합니다. 그러나 사자는 얼룩말은 잡아먹지만 참새는 먹지 않죠. 그러므로 참새에게 사자는 지나가는 거대한 고양이에 불과합니다. 반면 얼룩말에게 사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죠. 때문에 사자는 참새가 아닌 얼룩말의 천적이라고 불립니다.
즉 천적은 학술적으로 이렇게 정의됩니다. “어떤 생물체를 죽이거나, 번식 가능성을 억제하거나, 개체 수를 줄이는 기능을 하는 생물체” 좀 더 친근하게 요약하면, 천적이란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동의하시나요? 놀랍게도 이 정의에 따르면 얼룩말 역시 사자의 천적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굶어 죽는 사자
여기 배고픈 사자 한 마리를 상상해 봅시다. 사자의 눈 앞에는 얼룩말들이 있군요. 풀숲에 납작 업드린 사자는 고기 생각에 벌써 침이 흐릅니다. 곧 사자는 맘에 드는 얼룩말 한 마리를 포착합니다. 곧 사자는 그 얼룩말을 향해 뛰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얼룩말이 사자를 포착합니다. 얼룩말도 뛰기 시작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얼룩말은 정말 빨리 뛰었습니다. 말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사자는 고기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죠. 대신 배 속의 꼬르륵 소리만 더 커지고 말았습니다.
자 그러면 재밌는 상황을 한번 더 상상해 봅시다. 사자가 계속해서 사냥에 실패했다고 말이죠. 사자는 몇날 며칠을 굶었습니다. 이제 사자는 더 이상 뛸 힘도 없습니다. 마침 저기 가장 약해 보이는 얼룩말이 보이는군요. 그다지 먹음직스럽지는 않지만 지금은 가릴 때가 아닙니다. 사자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뛰어봅니다. 그러나 그 얼룩말 역시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갔습니다. 결국 다음날 사자는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얼룩말은 사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우리는 앞서 천적이란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무언가라고 정의했습니다. 얼룩말은 정말로 사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얼룩말은 사자의 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도망가는 얼룩말만이 사자의 천적입니다. 그들은 사자를 굶어죽이는, 동물의 왕의 유일한 천적입니다.
사슴 천국
사슴이 너무 많아져서 곤란해진 공원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공원이 황폐해졌다는 것을 눈치챕니다. 조사해보니 너무 많은 사슴이 공원의 풀을 모조리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슴이 그렇게 많아졌을까요? 늑대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슴을 잡아먹는 늑대가 사라지자 사슴 천국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와 비슷한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하곤 합니다. 천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지요. 이런 의미에서 사슴의 존재는 늑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적인 늑대가 성공적으로 사냥 한다면 사슴은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사자의 존재는 일정 부분 얼룩말의 책임입니다.
얼룩말 지옥
사자의 천적인 얼룩말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모든 얼룩말이 도망가지 않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사자들은 언제나 맛있는 고기를 배불리 먹게 될 것입니다. 잘 먹은 사자는 힘이 넘칩니다. 힘이 넘치는 사자는 사냥을 더 잘할 것이고 그 결과 사자는 힘이 더더욱 넘치게 되겠죠. 넘치는 힘으로 짝찟기도 하고, 새끼도 치고, 양육도 합니다. 그렇게 사자는 더 강해지고,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얼룩말 지옥이 도래하고 만 것이죠. 이러한 지옥은 얼룩말이 천적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필사적으로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기
아마 여러분 모두 모기를 싫어하실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기는 정말 혐오스럽습니다. 어릴 적 부터 저의 잠을 방해하는 원수이지요. 그런데 저는 모기에 대한 조금은 특별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문 모기만큼은 반드시 죽이자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히 나를 물다니 이 괘씸한 모기!” 와 같은 분노로 만든 신념은 아닙니다. (물론 피를 먹어 빵빵해진 모기에게 분노로 손바닥을 휘두르지만요) 대신 간단한 사실 하나가 저에게 이런 책임을 부여합니다. 바로 모기는 알을 낳기 위해 피를 빤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모기에 물릴 때 마다, 모기는 그 피를 영양분 삼아 알을 깝니다.
오늘의 모기는 어제 빼앗긴 피로 만들어졌고, 오늘 빨린 피는 내일의 모기가 됩니다. 심지어 한 마리의 모기가 여러 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래서 모기의 수를 줄이고 싶다면 절대 물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렸다면 책임을 다해 모기를 죽여야 합니다. 나의 피로 만들어진 모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단잠을 방해하기 전에 말이죠. 얼룩말에게 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자의 수를 줄이고 싶다면 얼룩말은 먹히지 말아야 합니다. 얼룩말은 천적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천적은 나의 책임
혹시 당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있으신가요?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 못 살게 구는 사람, 조롱하는 사람, 이용하는 사람. 당신의 천적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가깝게는 가족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직장이나 다른 곳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일정부분 우리의 책임입니다. 마치 사자의 존재가 일정부분 얼룩말의 책임인 것 처럼요.
그러나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저는 가해자는 어쩔 수 없었고 피해자가 나쁘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모기가 나의 피를 먹고 생겨났다고 해도 여전히 나쁜 놈은 모기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쁜 것은 언제나 가해자입니다. 단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해야할 일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은 곧 책임이 있다는 말이죠. 이 책임이 부담되신다고요? 그러나 이 책임은 곧 희망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피식자는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포식자의 강력한 천적입니다.
천적의 천적
학폭 가해자들 또는 일진 놀이를 하는 애들을 한번 쯤 만나보시지 않았나요? 그러나 학폭 가해자는 피해자 없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괴롭힐 친구가 없다면 일진놀이를 할 수도 없습니다. 학교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상사는 직원이 없으면 상사이지도 못합니다. 독재자는 독재할 대중이 없다면 독재자이지 못 합니다. 그들은 마치 모기와 같습니다. 피를 빨며 생존하는 혐오스러운 악당이지요. 피가 없으면 모기는 죽습니다. 포식자는 피식자 없이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마치 얼룩말을 잡아먹지 못해 굶어죽은 사자처럼 말이죠. 당신을 잡아먹는 무서운 천적이 있더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천적의 천적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요.
싸울 이유와 싸울 힘
이 사실을 기억하면 두 가지가 생깁니다. 천적에게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와 맞서 싸울 힘이 생깁니다. 얼룩말이 도망가야 하는 이유는 사자를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자가 배고파서 비실대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사자의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얼룩말은 그 목적을 위해 필사적으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악당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당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싸움이든 도망이든 우리는 악당을 굶겨야 합니다.
얼룩말은 사자가 무섭다고 얼어붙어서는 안됩니다. 사자의 천적이 사자 앞에서 얼어붙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나의 천적 앞에서 무력하지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당당해야 합니다. 절대 체념하지 말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나는 악당을 굶어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천적입니다. 무력감이 사라지고 힘이 샘솟는 게 느껴지시나요? 당신을 잡아먹으려는 나쁜 존재를 만난다면 이 한마디를 꼭 떠올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