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공룡을 닮았던 그 친구는 진심으로 억울해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독서퀴즈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친구가 대회에 참가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편의상 공룡이라고 부를게요.)공룡은 덩치가 정말 산만하고 정신은 더더욱 산만한, 독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공룡이 어느 날부턴가 퀴즈 대회 1등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자주 허풍을 떠는 친구였기에 처음에는 모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룡은 산만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정말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공룡은 학교 전체에서 힘이 가장 센 친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 신체적 재능 덕분에 운동에서 남들을 압도했습니다. 운동을 잘하기도 잘했지만 좋아하기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시간만 나면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친구 중 하나였죠. 그런 공룡이 남들이 축구하고 농구할 때, 책을 읽었습니다. 공룡은 게임도 정말 좋아하는, 그야말로 “노는 게 제일 좋아!” 스타일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공룡이 남들이 놀고 게임을 할 때 책을 읽었습니다.
공룡에겐 아마 영혼을 죽이는 듯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들썩거리는 몸을 억눌러야 했고, 부러운 마음을 참아내야 했으니까요. 독서퀴즈 대회 1등을 위해 공룡은 영혼과 시간을 희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공룡은 희생의 걸맞은 대가를 받았을까요? 희생의 대가는 ‘광탈’이었습니다. 어이없는 실수로 공룡은 문제를 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학생부터 선생님까지, 모두가 그의 탈락을 아쉬워했습니다. 공룡이 열심히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안타까워했습니다.
공룡이는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공룡은 관중석으로 내려오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열심히 해도 안 되네요!” 그 말에서 혼란스러움과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아무것도 열심히 하지 않겠다는 결의였습니다. 이 실패의 경험이 공룡에게 배움이 되기보다는 트라우마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한 선생님 역시 그것을 느끼셨는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되지,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열심히 해도 이런데 열심히 안 하면 어떻게 되겠니?” 저는 그 당시에 참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멋있기만 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멋있는 말보다는 쓸모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해도 될까 말까 하는 걸 누가 모르나요? 그래서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열심히 했는데 실패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거 말고 열심히 해서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희생을 치렀는데 하늘이 날 배신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희생에 걸맞은 대가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겠지 -진격의 거인-
제물
희생에 대해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음이 분명합니다.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바로 그 증거이죠. 고대에서부터 인류는 제물을 바치는 의례를 행해 왔습니다. 조상님들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요? 제물의 의미는 정확히 이런 의미입니다. "하느님! 올해 수확한 곡식과 오늘 잡은 고기를 제물로 바칩니다. 그 대가로 내년에 더 많은 곡식과 고기로 보답해주세요." 즉, 제물은 더 좋은 미래를 얻기 위해선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는 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더 먼 미래를 고려할수록 사람은 더 강력해집니다. 어른이 아이보다 진정 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죠. 사람은 어른이 돼가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줄 알게 됩니다. 지금 눈앞의 마시멜로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알게 됩니다. 내일 2개의 마시멜로를 받는 게 더 좋기 때문이죠. 노래방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공부를 할 줄 알게 됩니다. 내년에 화려한 대학 생활을 위해서죠. 사고 싶은 명품을 포기하고 적금을 듭니다. 5년 뒤에 집을 마련하고 결혼하기 위해서죠.
미래는 인간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미래를 예측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일주일 뒤, 1년 뒤, 심지어 10년 뒤를 고려합니다. 이것이 침팬지가 인간을 반으로 찢어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팬지는 철장 안에, 인간은 철장 밖에 있는 이유이죠. 미래의 힘은 침팬지의 완력보다, 호랑이의 이빨보다 강력합니다.
인간은 어쩌다 이런 능력을 얻게 되었을까요? 먼 과거에는 인간도 다른 동물들처럼 순간의 욕망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눈앞의 음식을 배가 터질 때까지 밀어 넣었겠죠.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의 조상님들은 음식을 남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남은 음식을 저장하는 법을 배웠죠. 내일은 사냥에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의 조상님은 “내일 사냥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조상님에겐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죠. 가장 간단하게는 전부 배 속에 집어넣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선택지는 아니죠. 위 용량의 한계가 있을뿐더러, 내일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적당히 먹고 보관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 못 먹는 일도, 배고픔의 고통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상님에겐 냉장고가 없었죠. 보관기간에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조상님들에겐 집이 없었습니다. 과거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했죠. 끊임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양의 음식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죠. 저장 용량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류는 혁명적인 발견을 하게 됩니다. 조상님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란 매일 사냥에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나리오를 가장 근사하게 달성하는 방법은 놀랍게도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기였습니다. 나는 사냥에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는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오늘 사냥에 성공했다면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내일 당신이 사냥에 실패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보답받을 것이기 때문이죠. (인간이 배신자를 혐오하게 된 이유는 정확히 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조상님은 그렇게 친구의 뱃속에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조상님들은 미래를 대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사냥감을 전부 잡아먹기보다는 일부를 살려두었습니다. 살려둔 동물이 새끼를 낳아주길 기대했기 때문이죠. 그래야 내년에도 사냥감이 끊기지 않을 것입니다. 살려두다가, 나중엔 보호하고, 결국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가축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조상님들은 당장의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일조차 그만두었습니다. 내년의 수확을 기대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죠. 흉년을 대비해 저장창고를 만들었고, 저장창고를 지키기 위해 군대가 생겼습니다. 도시가 생기고, 상업이 발달하고, 문명이 탄생했습니다. 미래는 인간을 음식을 나누는 사회적인 동물로, 정착 생활을 하는 동물로, 문명을 이루어낸 동물로 만들었습니다. 미래는 인간을 가장 잘 설명하는 특징입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합니다. 창업을 하는 사람들, 투자를 하는 사람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미래를 걱정하죠. 늑대 연구가 라딩어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하는 일을 늑대들도 한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인간만 이 능력을 잃은 것 같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어쩌면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붓다는 이를 일찌감치 깨닫고, 현재에 존재할 수 있도록 명상이라는 수행을 만들었죠.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붓다처럼 하루 종일 명상하며 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랑하고, 놀이하고, 일하며 살아가죠. 모두가 붓다처럼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그저 누군가의 친구가, 아버지가, 어머니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부처가 되는 것 못지않게 쉽지 않습니다. 한순간에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리고, 목숨을 잃죠. 이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인간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합니다. 이는 나약한 인간이 가진 유일한 무기입니다.
가인과 아벨
유일한 무기가 통하지 않을 때만큼 당황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제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일입니다. 저는 그 나라 말도 모르고, 길도 몰랐습니다. 어디가 유명한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자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죠. 그러나 괜찮았습니다. 저에겐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까요.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고, 구글 맵을 사용할 계획이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예약도 하고 검색도 하고, 연락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역시나 인생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 스마트폰을 켰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작동하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너무 당혹스러웠습니다. 내가 준비해 온 것이라곤 이 스마트폰 하나밖에 없는데, 정말 망했다 싶었습니다. “당장 숙소는 어떻게 찾아가지?” “나 이번 여행 무사히 해낼 수 있는 거 맞아?” 여행사의 도움 없이 온 여행은 처음이었기에, 저는 필요보다 더 당황했습니다.
저에게 스마트폰이 그랬던 것처럼, 준비했던 유일한 무기에게 배신당했을 때 인간은 무한한 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앞에서 알아보았듯,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제물”이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제물이라고요. 우리에겐 강력한 발톱도, 치명적인 독도 없습니다. 대신 우린 제물을 바칠 줄 알죠. 그런데 현재를 희생했는데 원하는 미래가 오지 않았다면? 즉, 제물을 받쳤는데, 하늘이 배신했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공항에서 방황하던 저처럼 말이죠.
이 문제에 대해 인류가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이 바로 그 증거이죠. 왜냐하면 아주 오래된 책이자, 아주 오랫동안 생존한 성경의 주제가 바로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성경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성경의 첫 문장입니다. 하나님은 산과 바다를, 토끼와 독수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물론 인간도 만드셨죠. 하나님은 흙으로 몸을 빚으시고 숨결을 불어 넣어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와”라는 여자도 만들었죠. 그렇게 아담과 하와는 행복한 에덴동산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부부는 하나님이 절대 먹지 말라던 선악과 열매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그것만 따먹지 않았어도,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처럼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하지도 않고, 옷도 입지 않은 채로.
선악과 열매를 먹고 아담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옷을 입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죠. 인간이 자의식을 획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천국 같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냅니다. 이제는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했죠. 그렇게 아담은 노동해야만 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인간이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현재를 희생해야만 하는 운명에 갇힌 순간이었습니다. 에덴동산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 시작했다."
에덴동산 다음 이야기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척박한 세상에서 태어난 아담과 하와의 아들입니다. 가인과 아벨도 아버지의 저주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노동을 한 것이죠.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목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수확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질투했고, 하나님에게 화가 났죠. 그래서 하나님이 아끼는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특히나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인간’ 이야기라는 점에 중요합니다. 첫 번째 인간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 아니냐고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담과 하와는 조금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처럼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죠. 그들에겐 어린 시절도 부모도 없습니다. 어린 시절과 부모가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생각하면, 분명 그들은 조금은 다른 존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해내신 어떠한 상징적, 신화적 존재이죠.
반면 가인과 아벨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나 자랐죠. 최초의 평범한 인간입니다. 자 그럼 최초의 인간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랑 이야기? 영웅 이야기? 우정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물을 바쳤는데 하늘이 배신한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은 그만큼 이 문제를 급박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정말 오랜 기간 생존한 책입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있었다는 말도 있고, 기원전 8세기부터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야기는 성경이라는 책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문자가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인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았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죠.
가인과 아벨이 역사적으로 실존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모르는 일이죠. 그러나 이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설득력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인간 행동과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실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첫 번째 이야기로 할 만큼 중요하고 급박한 이야기, 오랫동안 생존한 이야기, 하늘이 나의 제물을 받아주지 않은 이야기,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분석해 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어째서 가인의 제물을 받아주지 않으셨을까요? 반대로 아벨의 제물은 왜 받아주셨을까요? 아벨은 마음을 다해 제물을 바쳤지만, 가인의 마음은 불건전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어디에도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받아주지 않았다고 간단하게만 나와있죠. 이유는 없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잠시 신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격을 갖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모든 것에 인격을 부여하는 사고방식을 가졌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무에 인격을 부여해서 나무를 물질이 아닌 하나의 정령으로 생각했고, 천둥, 번개에 인격을 부여해 토르나 제우스를 생각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하나님 역시 동일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속 하나님에서 인격을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정의될까요?
나보다 더 큰 존재, 나보다 훨씬 강력한 힘,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어떤 힘,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나보다 더 오래되었고 영원히 존재하는 무언가, 모든 것의 원천 또는 모든 것, 언제나 옳은 것 등으로 정의될 것 같습니다. 잘 살펴보면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무언가입니다. 아니면 세계 또는 세상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또는 진리, 또는 온 우주, 또는 하늘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가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석됩니다. 가인은 농부였습니다. 수확할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동은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흉년이 든 것이죠. 단지 농사가 잘 안되는 해였던 것입니다. 단지 환경이, 세상이 농사짓기 좋은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안 될 운명이었던 것이죠. 네 맞습니다. 간단히 말해 노력했지만 잘 안된 것이죠. 이것을 조금 시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바친 제물을 하늘이, 즉 신이 받아주지 않았다고요.
반대로 아벨은 노력한 만큼 대가가 따라왔습니다. 농사는 망했지만, 목축은 잘 된 것이죠. 가인이 성공한 아벨을 보았을 때 어땠을까 상상해 봅시다. 가인에겐 아벨은 매번 양을 데리고 나가 농땡이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뼈 빠지게 일하고도 망한 가인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이지 않았을까요? 아벨보다 더 노력했는데, 또는 아벨 못지않게 열심히 했는데 나는 왜? 가인은 너무나 불공평한 세상에 분노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신에게 화가 난 것이죠. 그렇게 가인은 하나님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시에 불공평을 근절하기 위해 아벨을 살해합니다. 인류의 첫 살해는 이러한 질투, 세상에 대한 분노를 동기로 벌어집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그만큼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의 제물을 신이 받아주지 않았을 때, 헛되이 희생하고 말았을 때, 불공평한 세상을 마주했을 때, 최고로 비도덕적인 충동에 휩싸인다는 것을요.
아마 많은 사람이 가인이 되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을 때, 그런데 맨날 게임을 하던 친구는 시험을 잘 보았을 때, 놀지도 않고 열심히 살았지만 여전히 통장이 텅 비었을 때, 바로 그때 부모 잘 만나 평생 놀고먹는 친구를 보았을 때, 이쁘게 태어나 편하게 사는 친구를 보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화가 나고, 아벨을 미워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마음속에서 무시무시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영혼을요.
예수님과 십자가
자 그러면 다시 핵심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제물을 바쳤지만 하늘이 배신했을 때 인간은 큰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가인과 아벨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첫 번째 인간인 가인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완벽한 인간 예수님을 통해서 제시합니다. 이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과 십자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주 어린 양에 비유됩니다. 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 사용하던 동물입니다. 양 중에서도 어린 양은 가장 값비싸며 죄 없고 깨끗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어린 양에게 옮긴 후 제물로 바침으로써 죄가 없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어린 양처럼 죄가 없었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서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비유되는 이유이자, 예수님 스스로가 제물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하이라이트인 예수님의 이야기가 제물 이야기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혹시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성경이 제물 이야기를 처음 한 곳은 바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였습니다. 살인이라는 죄를 지은 가인과 죄를 사하신 예수님, 저는 이 둘의 연관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앞에 복선이나 화두를 던지고 뒤에서 멋지게 회수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자 가인은 구원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인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아벨을 죽이는 대신 가인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한 답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답은 바로 “스스로를 죽이기”입니다. (자살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니 안심하고 읽어도 됩니다. ^^)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처형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존재,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분명 이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죠. "나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꼴이니까요. 하지만 이것을 모를 만큼 성경은 바보가 아닙니다. 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있는 것입니다. 또는 그렇게 해야지만 설명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자,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켰습니다.
나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나요? 나의 몸통인가요? 나의 머리인가요? 아닙니다. 나의 의식, 나의 인격, 나의 자아를 의미하고자 우리는 “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요? 기억, 성격, 정체성, 꿈, 욕구, 트라우마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가치관을 희생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나의 업적, 나의 작품, 나의 노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 자식과도 같은 것들입니다. 나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나에게서 탄생한 소중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희생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결과물을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제물로 바쳤어야 했느냐고 묻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궁극의 제물을 알려주셨습니다. 열심히 해도 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궁극의 비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나의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지금까지 내가 투자해서 이뤄낸 모든 것들을 희생하라고 말합니다.
가인은 평생을 농부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평생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작물을 길러왔을 것입니다. 자신을 농부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가꾸어 놓은 밭이 있었을 것입니다. 열심히 만들어 놓은 농기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농작물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가인이 사는 땅은 농사가 잘되지 않는 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농부를 포기하고 아벨처럼 목축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가인의 불손한 마음이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농작물입니다. 가인은 신이 원하는 제물을 바쳤어야 합니다. 가인은 고기를 제물로 바쳤어야 했죠.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농부로서의 정체성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가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굉장히 오랜만에 공룡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공룡이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비행기 조종사였습니다. 그래서 대학도 항공과를 진학했었죠. 그러나 저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공룡이가 대학을 자퇴했다는 것입니다. 자퇴하고 미국 항공 대학을 준비 중이라고 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학교가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공룡이에게 공부가 적성이 아니라는 것은 제겐 너무나 자명한 사실처럼 보입니다. 미국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도 시간과 돈만 잡아먹을 뿐, 그럴싸한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공룡이에게 의지 부족이라고 했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의지의 독재에 반항하기 마련입니다. 저에겐 공룡의 영혼이 대학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공룡이가 제물로 바치고 있는 돈과 시간을 신은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미래에 공룡이가 혹시 가인의 영혼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공룡의 속 사정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말을 아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죠.
남자애들이라면 어릴 적 한 번쯤은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기 마련입니다. 아마 공룡이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공룡은 그 꿈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환상과는 다르게 비행기 조종사는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공룡은 공부와는 잘 맞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룡의 영혼은 이 길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대학을 자퇴시키고, 학원을 그만두게 합니다. 신은 더 이상 공룡의 제물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룡이는 비행기 조종사로서의 자신, 비행기 조종사가 꿈인 자신,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돈,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혹시 이런 상황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어릴 적 꿈은 분명 소중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를 때 꾼 꿈이기도 합니다. 공룡이는 공부가 아닌 다른 재능이 많습니다. 다른 재능을 살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이 최선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죠.
부활
지금까지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낸다면 가장 중요한 절반을 빼먹는 셈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은 후 부활한 이야기이죠. 부활은 죽음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활이란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해도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의 나를 희생해야 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죽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인 세례는 정확히 이를 상징하고 있죠.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입니다. 과거의 나는 물속에서 죽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납니다. 농부 가인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가인, 죽은 가인은 농부 가인만큼이나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양치기 가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잠시 늑대 연구가 라딩어의 삶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평생 변호사를 꿈꿔왔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었죠. 그러나 그녀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그 자리까지 오기 위해 제물로 바친 모든 노력, 돈과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보답받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변호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변호사로서의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낸 커리어를 포기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늑대 연구가 라딩어로 다시 부활했습니다. 그녀는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가인처럼 왜 자신의 희생이 보답받지 못하냐며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처럼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뒤,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녀는 과연 성경의 지혜를 알고 있었을까요?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열심히 해도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되게 할 수 있을까? 저는 이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성경은 어떻게 답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제물을 바쳤지만, 신에게 거절당한 가인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배신하는 것보다 아픈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와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하늘이 바뀌는 것보다 내가 바뀌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요. 나는 열심히 했는데 왜 실패할까요? 어쩌면 '열심히'가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열심히 했던 "나" 그 자체를 바꿔야 할 때입니다.
난 너희가 세계라고 부르는 존재, 혹은 우주 혹은 신, 혹은 진리, 혹은 하나, 그리고 나는 너다.
자만하지 못하도록 올바른 절망을 주는것이 진리. 인간이 자만하지 못하도록 올바른 절망을 주는, 그것이 진리다. 그러니 네게도 절망을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