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 외우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자가격리 또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선물하고 있다. 집에 갇혀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가끔 우울해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넷플릭스만 보고 있을 순 없다. 이 참에 영어 공부에 시간을 투자해 보는 건 어떨까? 둘도 없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영어는 한국인들의 오랜 컴플렉스다. 한 때 영어를 가르치면서 다양한 학생들을 만났는데 대부분은 주요 4년제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들이었고, 최소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워온 사람들이었다. 보통 수천 개의 단어를 이미 알고 있었고, 기본 문법에도 익숙했다. 토익점수 기준으로는 600-900점 사이가 많았다. 원래 어떤 언어를 이 정도 알면 기본회화가 편하게 가능해야 한다. 적어도 주눅 들지는 않는 게 맞다. 이렇게 많이 배웠는데 대체 왜 영어는 아직 많은 이들에게 컴플렉스로 남아있을까? 정말 어순이 달라서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가 특히 어려운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어권에 살아보지 않고도 영어를 잘하는 한국 사람이 꽤나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교육 방식이 문제다. 방법이 틀려서 힘든 것이다. 또 영어를 잘 못하면 부끄러운 것이라는 왜곡된 교육 메시지도 문제다. 대체 왜 영어는 못해도 부끄럽고, 발음을 잘 굴려도 부끄러워야 하나? 영어 쓸 일 없으면 못해도 된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주눅 들지 말자. 다만, 어떤 이유로든 영어를 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학을 가지 않고도 영어를 제대로, 그것도 공짜로 배울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영어공부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단 하나를 꼽으라면 통으로 외우는 것이다. 책이나 대본 같은 텍스트를 외우는 것보다, 나는 영어 스피치 암송을 추천하고 싶다(쉐도윙이라고 많이 하던가? 쉐도윙은 따라 하는 것까지고, 내가 말하는 건 완전히 외워 입 밖으로 말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책으로 배우는 문어체보다는 구어체인 스피치가 자연스러운 회화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유명한 스피치들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잘 다듬어진 말이기 때문에 멋스러운 표현들도 많이 배울 수 있다. 책 외우기보다 더 재미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소리를 외우고 따라 하려는 것이지 글자를 외워서 내용을 머리에 저장하려는 게 아니다. 영어 학습과 더불어 인생 공부까지 된다는 점도 덤이다.
입문용으로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을 추천한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 프레젠테이션 고수로 유명했다. 단순히 발표 기술이 좋았던 게 아니라 그의 스토리텔링이 수준급이었다. 팩트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스토리로 엮어서 전달했기 때문에 귀에 쏙쏙 박혔던 것이다. 이런 잡스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에서 빛났다. 한 번만 들어도 잊기 어려운 이야기다. 시적인 표현을 즐겼던 그의 성격에 어울리게, 스피치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가득하다. 꽤 재미있게 듣고 따라 하고 외울 수 있을 것이다.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이걸 다 외웠다면 약 150개 영어 문장을 외운 것이다. 단순히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꺼내서 입으로 내뱉을 수 있는 문장의 수다. 우리가 일상 대화에서 쓰는 영어 표현의 상당 부분 이 150개의 문장 안에서 찾아 변형하면 만들 수 있다. 쓸데없이 더 많은 문장을 외우는 것보다 스토리와 발음, 호흡, 말투, 적절한 사용 맥락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 어차피 창의적인 문장은 없다. 원래 아는 문장에서 단어만 바꿀 뿐이다. 고급진 문장에서 단어를 바꾸면 나도 고급진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심지어 대학에서도 질문하지 않도록 교육받아왔다. 그런데 유독 영어 공부를 할 때 필요 이상의 질문을 많이 한다. '관사는 어떻게 맞춰 쓰는 거지?', '이 동사의 과거형은 뭐지?', '왜 have 다음에 과거 분사를 써서 have + p.p 형태를 만들어야 하지?, '왜 이렇게 표현 안 하고 저렇게 표현하지?'와 같은 분석적인 질문들 말이다. 이런 질문들이 아예 쓸데없는 건 아니지만, 일상적인 기초 회화도 못하는 사람들이 던져야 할 질문들은 결코 아니다. 영어를 배울 땐 질문이 적을수록 좋다. 우리가 어려서 우리말을 배울 때, 문법이나 어휘 용법에 대해 부모님께 질문해본 적이 있던가? 질문하지 말고 외워서 입에 붙도록 만들어야 한다(물론 내가 외우고 있는 영어문장이 우리말로 어떤 의미인지는 찾아보고 알아야 한다). '왜?'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너무 익숙해서 그 어색함이나 궁금함이 올라오지 않는 게 최고다.
이런 식의 학습 방법이 회화에는 좋을지 몰라도 수능이나 토플이나 토익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결코 그렇지 않다. 개인적인 경험이다. 수능, 토플, 토익, 지멧 모두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문법 따윈 필요 없다. 문장을 쪼개고 또 쪼개는 문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올바른 문장의 예시들이 머리에 충분히 많이 들어가 있어 생기는 직관이 필요하다.
우리는 학습할 때 본능적으로 체계를 원한다. 잘게 쪼개서 분류하면 체계적으로 보인다. 뭔가 틀에 맞춰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지워나가야만 뭔가 제대로 학습한 느낌이 든다. 문제는 그게 정말 '느낌'일뿐이란 점이다. 이런 '공부한 느낌'을 느끼도록 해주는 학교/학원 강의들이 너무 만연해있다. 이게 돈이 되게 때문에 학원들이 이런 시스템을 바꿀 유인은 전혀 없다. 명쾌한 강의로 문법책을 한 권 끝내주는 강의는 돈 낼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영어 문장을 소리 내서 많이 읽고 따라 해서 외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강의에 돈을 낼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 교환학생으로 7개월 정도 산 적이 있다. 네덜란드의 공용어는 당연히 네덜란드 말, 즉 더치(Dutch)다. 그런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가 가능했다. 상당히 편하게 말이다. 이게 그리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런데 집도 없이 구걸하며 생활하는 홈리스들도 내게 유창한 영어로 구걸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10년 동안 영어를 공부하고 수능을 치른 한국의 평균적인 성인보다 네덜란드 걸인들이 영어 회화를 더 잘할지도 모른다(그런 것 같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많이 듣고 소리 내 따라 하는 것 말고는 왕도가 없다. 대부분 경우에 영어학원은 낭비다.
요즘 시간이 많은 독자분들이라면 달고나 커피 만들어 마시지 말고, 스티브 잡스의 명연설을 암기해보자. 제발 종이에 쓰면서 속으로 외우지 말고, 큰 소리로 소리 내면서 계속 따라 하기 바란다. 재생속도를 0.75배나 0.5배로 늦추면 충분히 동시 따라하기(쉐도윙)가 가능하다. 스티브 잡스의 목소리, 톤, 속도, 어투, 감정 모두 비슷하게 될 때까지 따라 하자. 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 스탠퍼드 연설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1i9kcBHX2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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