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시골 아파트 1년 거주 후기
미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모두 주택에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 통계청(United States Census Bureau)에 따르면 미국 거주자의 약 77%가 주택에, 20%가 아파트에, 나머지 3%가 기타 주거형태로 살고 있다고 한다. 미국 인구가 3억 3천만 명 정도 되니까 6천6백만 명이 아파트 거주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도 2019년 6월 미국으로 유학 온 뒤부터 1년 조금 넘게 아파트에 살고 있다. 미국은 워낙 큰 나라니까 전부 싸잡아 이렇다 저렇다 말하긴 어렵다.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로 한정해야겠다. 버지니아는 고층 빌딩이 별로 없는 편이고, 한국처럼 20층짜리 아파트를 보긴 어려운 곳이다. 여기서 아파트라고 하면 보통 4층짜리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마찬가지고, 나는 지금 3층에 거주하고 있다. 높이뿐 아니라 버지니아의 아파트는 한국의 아파트와 여러모로 다르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좀 더 주택 느낌이 나는 아파트라는 점에서 나는 한국 아파트보다 버지니아 아파트가 좋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뭔가 카펫이라고 하면 먼지가 많을 것 같고 불편할 것 같다. 나도 미국 도착 전에 걱정을 했었다. 원래 비염이 심하기 때문에 카펫이 깔린 집에서 먼지를 더 먹고살면 비염이 더 심해질 줄 알았던 것이다. 물론 카펫이 오래돼서 오염이 되었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입주자가 바뀔 때마다 카펫을 새 것으로 교체하기 때문에 나는 깨끗한 새 카펫이 깔린 집으로 입주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오자마자 비염은 그냥 사라졌다.
카펫은 마루나 장판보다 쿠션감이 있어서 집에서 양말을 신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무릎에 무리도 가지 않는 느낌이다. 청소기를 돌리기도 뭔가 더 쉽다. 딱딱한 바닥과 달리 청소기와 카펫 바닥이 찰싹 달라붙어서 진공청소기가 더 위력을 발휘하는 느낌이다. 그냥 느낌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이런 쿠션감 있는 카펫 위에서도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미국인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깨끗하게 관리도 어려울 텐데... 아무튼 맨발로 실내생활을 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쿠션감 있는 카펫이 깔린 아파트는 생각보다 괜찮다.
단점도 있는데, 커피나 음료 같은 걸 쏟으면 돌이킬 수 없다. 요즘 카펫은 화학적으로 오염이 덜 되도록 만들어져서 어느 정도 물티슈로 닦아 청소할 수는 있다. 그래도 자국이 남는 건 피할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고 바닥에 음식물을 많이 떨어뜨리면서 카펫에 이런저런 색깔의 얼룩이 났다. 이걸 지우려면 카펫 전용 청소기와 세제로 대대적인 청소를 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아직 도전해보진 않았다. 그냥 2-3년마다 카펫을 새것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다행히 건식 화장실 바닥은 마루다. 여기까지 카펫이 깔려있는 집들도 있다고 하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화장실 바닥이 카펫이라니... 아무튼 우리 아파트는 마루이고, 이런 건식 화장실은 한 번 익숙해지면 다시 습식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듯하다. 무엇보다 화장실에서 화장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다른 방 느낌이다. 습하지도 않고 뭔가 찝찝한 느낌도 없다. 아 물론 전제는 남자들도 앉아서 볼일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불편할 수도 있는데, 이게 얼마나 화장실 청결에 중요한지는 해보면 안다. 화장실에 슬리퍼는 없다.
내가 사는 곳 주변 대부분 아파트에는 실외 수영장이 갖춰져 있다. 크기나 시설 상태는 천차만별이다. 다행히 우리 아파트는 지은 지 몇 년 밖에 안돼서 시설이 좋은 편이다. 역시 새 아파트가 좋다. 특히 요즘처럼 실외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다. 너무 더워서 밖에서 다른 운동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수영은 정말 좋은 대안이다. 요즘 나는 수영할 때 빼고는 밖에도 잘 안 나가는데, 수영장이 없었다면 아예 운둔 생활을 했을 거다. 수영장에 딸린 바비큐 시설은 덤이다.
클럽하우스는 TV와 테이블, 커피머신 등이 구비돼 있는 공용 공간이다. 한국 아파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다. 파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에겐 파티를 즐기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냥 친구들이나 가족이 놀러 오면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노닥거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 아파트는 이 클럽하우스에 콘퍼런스룸과 회의실, 영화관이 갖춰져 있다. 호텔 로비와 비슷한 공간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고 보니 미국 아파트는 결국 많은 점에서 호텔과 비슷한 공간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가장 좋은 걸 꼽으라면 이것이다. 시스템 에어컨. 에어컨 실내기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방마다 천장에 환풍기처럼 생긴 구명들이 나 있다. 중앙 통제식이며 방마다 개별적인 온도 조절은 안 된다. 한국에 살 때를 생각해보면 더울 때 에어컨을 틀었다가 추워지면 껐다가를 반복했었다.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냥 원하는 온도로 설정을 해놓으면 시스템 에어컨이 알아서 그 온도를 유지할 뿐이다. 어찌 보면 24시간 돌아가는 에어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같은 온도 유지, 이건 비염 있는 나나 내 아내 같은 사람들에겐 꿈같은 일이다.
그러면 전기비가 훨씬 많이 나올까? 한낮에 40도까지 올라가기도 하는 이곳 버지니아의 뜨거운 여름에 전기비는 최고 100 달러, 12만 원 정도 나온 적이 있다. 보통은 80 달러 수준이다. 이건 도시나 주마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같은 온도가 유지되는 쾌적한 환경에 살면서 한 달 10만 원은 참 합리적인 수준인 것 같다. 한국에서 지금 집보다 절반도 안 되는 평수에 살 때도 그 정도 전기비는 나왔으니까.
미국은 고층빌딩 외에는 목조건축물이 참 많다. 주택뿐 아니라 아파트도 나무로 지으니 말이다. 우리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장점은 와이파이가 팡팡 터진다는 점이다. 한국은 시멘트 벽 때문에 방문을 닫으면 와이파이 신호가 약해지지만 여기는 1도 약해지지 않는다. 단점은 층간 소음이다. 위층 아래층 대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워낙 개를 키우는 집들이 많아 개 짖는 소리도 자주 들린다. 그나마 우리 아파트는 신축이라 나은 편이다. 오래된 아파트들은 걸을 때마다 나무 삐걱삐걱 거리는 소리도 들리곤 한다.
목조 건물이라 화재가 나면 그냥 한 순간에 끝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생각보다 미국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다는 뉴스는 보기 힘들다. 그만큼 예방 조치가 잘 돼 있는 걸까. 반년쯤 전에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학교 선배가 깜빡하고 음식을 태워서 그 연기 때문에 화재경보기가 울린 적이 있다. 10분 안에 대형 소방차 4대가 도착했다. 뭔가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이렇게 큰 나라에서 그렇게나 금방 그렇게나 많은 소방차들이 도착하다니. 그걸 보니 목조 건물에 살아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단지가 작아서일까. 이곳 아파트에서는 편의점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아예 아파트 상가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래서 밤에 갑자기 뭐가 필요하다 싶으면 차를 몰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우리나라처럼 몇 백 미터마다 편의점이 있는 게 아니라서 꽤나 운전해 나가야 한다. 한국처럼 수백수천 가구가 밀집돼 있지 않아서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일까 아니면 굳이 이 사람들은 급하게 뭐가 필요할 일이 없는 것일까.
상가 대신 여기는 주차장이 많다. 대륙 국가답게 지하 주차장은 없다. 모두 지상 주차장인데 그것도 워낙 넓어서 20% 정도 여유 공간이 항상 남아있다. 개별 주차 공간도 한국보다 훨씬 커서 문콕의 위험이 거의 없다. 이 넓은 주차공간까지 생각하면 비록 4층짜리 아파트라 해도 한국 20층짜리 아파트에 견주어 봐도 차지하고 있는 대지면적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