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의심하라
모든 것을 의심하라.
난 언제부턴가 (거의) 모든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와 타인, 종교와 이성, 보수와 진보, 이기심과 이타심 따위의 일상적인 실체나 관념들을 전부 다.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된 정확한 시점이 언제라고 콕 짚어내긴 힘들다. 위인의 인생을 극적으로 그려낸 영화나 평전들과는 달리 현실에서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이고, 내가 많은 것을 의심하도록 변해온 길도 그러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을 의심하라"는 말은 데카르트가 즐겨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훨씬 더 유명한 그의 명언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생각하는 주체인 자기 존재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로 봤고, 따라서 이를 철학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아무튼 대부분의 오래된 인용구가 그렇듯이 모든 것들을 의심하라는 이 말의 첫 출처도 데카르트가 아닐 게 거의 확실하지만 뭐 상관없다. 데카르트 같은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라서 취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의 말이었을 뿐이니까. 그래도 데카르트라는 이름이 더해준 권위 덕분에 내 인생을 지탱하는 한 마디가 더 '있어'보이는 점에 대해선 그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냄비 속 개구리 이야기를 우리는 오래전부터 많이 들어왔다. 개구리를 찬물에 집어넣고 물을 서서히 데우면 개구리는 이를 미쳐 알아채지 못한 채 죽고, 반대로 개구리를 끓는 물에 던져 넣으면 깜짝 놀라 펄쩍 뛰쳐나온다는 그 이야기. 진짜 그러한지 검증해볼 생각은 힌 번도 못해봤다. 그냥 그렇다고 하니 받아들일 뿐이고, 사실 확인은 생략한 채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계속 전해진다.
<싱크 어게인>의 저자이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워튼스쿨의 교수인 애덤 그랜트는 실험을 통한 직접 검증에 나섰다.
나는 최근에 이 유명한 개구리 이야기를 주제로 연구를 해봤는데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그 개구리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개구리는 심하게 화상을 입는데, 이때 개구리는 냄비에서 탈출할 수도 있고 탈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천천히 데워지는 냄비 쪽이 개구리에게는 실제로 더 유리하다. 자기가 놓여있는 물이 너무 뜨거워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개구리는 냄비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던 이 이야기가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자기가 무지 속에서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건 개구리가 아닌 인간이라고 애덤 그랜트는 말한다. 그는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쉽게 아무 이야기나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지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의심할 때의 불편함보다는 확신할 때의 편안함을 더 좋아한다.
그의 말처럼 의심하는 건 언제나 불편하고 머리 아픈 일이다. 그냥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 머리도 몸도 편하다. 편안하게 자기도 모른 채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는 점이 함정이지만. 바보는 지능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무지에 대해 무지한 것, 굳이 의심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자기가 뭘 좀 안다는 확신까지 가진 사람이다. 스스로 그런 바보 중 하나로 남을까 두려워서,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이 말을 꼭 붙들고 힘들고 피곤하게 살기로 한 것이다.
이번 주제는 시작부터 난관이었네요. 여러분은 마음속에 이런 한 마디쯤은 당연히 가지고 살아가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니었네요. 좋아하는 문구나 명언이 꽤 많이 있지만 그것들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없어서요. 그냥 책을 읽다가 마음을 울리는 말들을 만나면 형광펜으로 표시해 두는 정도입니다. 까끔 다시 들춰볼 때도 있지만, 그런 문자들이 이 무거운 인생을 지탱해줄 정도로 힘이 있는지는 의문이네요. 힘들 때 딱히 위로를 줬던 한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고요.
뭐든 하나를 고르라면 어렵습니다. 명언 하나 고르는 것뿐만 아니라 저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여자 연예인, 책, 음식도 잘 꼽지 못하거든요. 그때그때 다른데 어떻게 하나만 고를 수 있겠어요. 저는 그냥 이게 좋을 때도 있고 저게 더 맛있기도 하고, 이 영화가 최고 재밌기도 하고 저 연예인이 더 예뻐 보일 때도 있고 그런 거 같습니다. 이런 제 성격 탓에 이번 글 주제에 대해 쓰는 게 이토록 어려웠던 거죠.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을 고르긴 했는데 워낙 딱딱하게 느껴지는 말이라 어찌 풀어나가야 할지 당황했습니다. 데카르트 얘기도 원래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적어도 누가 한 말인지는 알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억지로 끼워 넣었네요. 어차피 명언이라고 하는 것들이 출처가 확실치 않아서 큰 의미는 없지만요. 그냥 데카르트의 말이라고 멋들여 적어놓으면 허세를 부리는 모양새가 될까 봐 '데카르트 이름 덕에 내 인생을 지탱하는 한 마디가 있어 보여서 감사한 마음이다'라는 식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다음에 또 어떤 내용으로 글을 이어가야 할지 막막해하다가 예전에 써놓은 제 글에서 일부를 발췌해 써보기로 했습니다. 글을 써야 하지만 잘 안 써지거나 새로 쓰기 귀찮을 때 좋은 방법이죠. 마침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이 글의 주제와 딱 맞는 글과 우화가 있더군요. 뜨거운 냄비 속에서 익어 죽는 개구리 이야기죠. 우리가 타성에 젖어서 의심 없이 남의 말들을 믿고 퍼 나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 의외로 틀린 정보가 많다는 논지를 전달하기에 좋은 내용이라고 판단해서 가져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심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경험도 써보려 했지만 1000자 글자 수 제한에 가로막혀 급히 글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한참 찝찝했네요. 글을 쓰다 만 느낌이라서요. 밥을 먹다 만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원래 브런치에 발행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본래 성공도 실패도 연습의 일부라는 말을 되새겨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쓰기 어려운 주제라도 어떻게든 한 편의 글을 마무리하고 마는 경험도 나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쓰기, 하루도 쉬운 날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