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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혁재 Jan 20. 2020

미국에 살고 싶은 이유

* '당신이 미국에 살아야하는 이유'가 아님에 주의


난 오래전부터 미국에 다시 살게 되기를 꿈꿔왔다. 한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대학원은 미국으로 가게 될 거란 걸 항상 알고 있었다. 10년 가까이 연애한 지금의 아내한테도 이 부분은 처음부터 분명히 소통했다. 나는 미국에 살고 싶으니까 혹시 싫다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좋을 거라고. 무슨 허세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내는 그때도 지금도 날 따라서 어디든 가서 살겠다고 한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


결혼한 지 15개월 만에 한국을 떠나 미국 땅을 밟은 지 7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첫 아이도 태어나고 대학원 첫 학기도 무사히 마쳤다.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미국 생활은 100% 만족스럽다.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딱히 생각 나는 게 없는 데, 굳이 하나를 꼽자면 한국처럼 맛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것 정도다. 그럼 구체적으로 미국 생활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뭘까? 나는 왜 예전부터 미국에 살고 싶었을까?


1. 한국의 미세먼지 vs. 미국의 청정자연

서울 여의도 vs. 뉴욕 맨하탄


나와 아내는 비염이 심한 편이다. 공기가 조금만 안 좋아도 코가 막히고 콧물이 흐른다. 거기다 난 알레르기성 결막염도 심해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눈도 심하게 충혈된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 2015-2018년 사이 결막염 치료용 안약을 달고 살았다. 코를 뚫기 위한 항히스타민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미세먼지는 해가 지날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는 듯하다. 2016년만 하더라도 내가 미세먼지 때문에 한국에 오래 못살겠다고, 미국 유학을 빨리 가야겠다고 말하면 내 지인들은 대부분 갸우뚱했다. 나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그때부터 난 미세먼지 마스크를 애용했는데, 온종일 여의도를 누비고 돌아다녀도 나 말고 마스크 한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공기가 너무 깨끗해 폐가 호강 중이다. 비염도 많이 호전됐고, 알레르기성 결막염은 단 번에 사라졌다. 마스크를 다시 찾을 일고 없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던 버릇도 지워졌다. 매일 아내와 산책하면서 맛있는 공기를 마시는 일은 포기하기 싫은 큰 행복이다.


2. 한국의 획일성 vs. 미국의 다양성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99%의 사람은 한국인이다. 내가 직장 생활했던 여의도에서 특히 회사에서 외국인을 볼 일은 극히 드물었다. 가끔 접할 수 있는 외국인이라고 해봤자 한국어가 가능한 중국인 정도였다. 비슷해서 편하고 소통하기 더 쉽지만 단조롭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보고, 비슷한 시기에 취업하고 결혼하는 이 획일성이 나는 지겨웠다. TV에서 대기업들이 '글로벌 리더'를 운운하는 광고가 나올 때 그걸 보기가 그렇게 싫었다. 아니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은 고사하고, 같은 한국 사람이 조금만 다른 식으로 행동해도 아니꼽게 보는 조직들이 대체 어떻게 '글로벌 리더'를 양성한단 말인지. 이미 양성된 '글로벌 리더'가 그런 기업들에 가서 일 할 턱도 없다.


획일성이 무조건 나쁘고 다양한 게 무조건 좋은 건 물론 아니다. 미국이 가진 조금 도를 지나치는(?) 다양성도 그 나름의 문제는 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겐 좀 더 인류애가 생겼다. 한국에서 다수가 공유하는 삶의 방식과는 너무도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게 참 재밌다. 나이, 성별, 피부색, 직업, 국적에 상관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아내는 60대 백인 미국인 할머니와 절친이 됐고, 내겐 열 문장으로도 표현할 수 없이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생겼다. 이런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과의 인연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3. 한국의 교육 vs. 미국의 교육

나도 한국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돌이켜봐도 학교에서 뭘 배웠나 싶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난 항상 생각했다: '어느 대학을 가던 일단 이 쓸데없는 공부 열심히 해서 후딱 끝내고 넘어가자. 뒤돌아보지 말자'. 한국식 교육의 유일한 목적은 상위권 대학 진학이다. 배움이 아니다. 짧은 시간 다양한 과목에 포함된 지식의 파편들을 최대한 머리에 많이 욱여넣어 시험을 잘 보는 거다. 공부만 있지 학습/배움은 별로 없다. 제한된 자원을 배분하기 위한 줄 세우기 수단일 뿐이다. 때문에 학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진짜 필요한 일들, 예를 들자면 글쓰기, 투자(돈 관리), 소통, 시간관리 등을 가르치지 않는다. 어차피 학교에서 수학 과학만 배울 거라면 난 내 딸을 홈스쿨링 하겠다. 앞으로 노동가능인구가 계속 줄어서 굳이 사람들을 이토록 경쟁적으로 줄 세울 필요가 줄어들면, 한국 교육도 조금 바뀌려나.


미국 교육도 문제는 많다. 주거지역별 공립학교들의 수준 격차가 너무 심하다. 저소득층 자녀들이 주로 진학하는 학교들에서는 마약범죄나 푝력/성범죄가 흔하게 일어나고, 고등학교 졸업률도 절반 수준인 곳들도 많다.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낀 미국식 교육의 최대 장점은 그 목적에 있다. 내가 보는 미국 교육의 최우선 목적은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게 아니다. 이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 대학 입학시험이다. 한국 수능은 1년에 단 한번, 모두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본다. 시험 점수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줄이 세워진다. 그날 몸이 아프거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예외는 없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그 귀한 10대의 1년을 또 허비해야 한다. 줄 앞에 서기 위해서. 반면 SAT는 한 해 여러 번 볼 수 있다. 원하는 날짜에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영향력이다. SAT 점수는 대학입학평가의 한 부분일 뿐이다. 만점을 받는다고 뉴스에 나올 일도 아니다. 리더쉽 경험이나 사회봉사, 스포츠/취미활동 등 다른 역량이 많이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지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공부만' 하는 소극적 학생이 한국처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미국 교육의 목적은 학습능력 뿐 아니라 리더십과 사회적 책임의식 등 여러 요소를 두루 겸비한 '건강한 사회 구성원 만들기'다. 그 목적이 실제 얼마나 잘 달성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이런 이유들로 난 아직 미국에 더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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