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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열이나서 퇴근하던 길에 든 잡상 정리.

by JayD

“저는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아요”라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다. 단순히, 인간은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 보다는 해야하는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수음이나 배설을 우습게 생각했다. 이상한 자기만족도 꼴불견이고, 남들이 코를 막을 악취가 나는 것을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은 감기때문에 일을 남겨두고 퇴근했다. 버스정류장 앞 분식집에서 저녁을 챙겨먹는데, 문득 “아.. 오늘는 걸어가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단 하나의 납득할만한 이유도 없이, 열난다고 일을 남겨두고 퇴근해서는 소중한 체력을 걷는 일에 낭비하기로 한 것이다.


귀에는 애청하는 팟캐스트에서 틀어준 루시드폴의 신보가 울리고 있는데도,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낙엽 사이에선 떨어진 은행냄새가 올라오고, 아마 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자도 발견했다. 찻길 옆이다보니 매연과 감기가 더해져 기관지는 비 인 후가 합심하여 비명을 지르고 이것저것 담겨있는 가방도 점점 무거워졌다.


그런데 그 많은 감정들 사이에서 가장 투명한 감정은 길에대한 낯설음 이었다. 나는 태어난 고장에서 40년 가까운 삶을 살았고, 이 길을 버스로 “자주”다닌것만 해도 20년은 되는 삶을 살았다. 버스에선 창밖을 안보는 사람도 아니고, 흔히 수필이나 소설에서 나오는 것 처럼 “문득 생각해 보니 걸어서 가 본 것은 처음”인 길도 아니다. 매일같이 다녔고, 자주 걸어다녔던 길이, 마치 해외여행에서 관광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거기서 뭔가를 느끼고 표현하고 싶어지고 막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그냥 그러기만 했다. 그렇게 집에 걸어서 도착을 하고 보니, 열에 헤롱거려 감성터져가며 느끼는 이런 낯선 느낌 자체가 너무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일 잘 정리가 되기 전에, 이유를 찾기 전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낯설음에 부끄러워 지기전에, 어딘가에는 부끄러워지고 냄새가 나고 말, 지금의 느낌을 남겨두고 싶었다. 배운 감정도 없고, 딱히 뭘 알게 된 것도 아니다. 그런게 없을까 머리를 굴려서 몇 가지 생각을떠올리는 촌극이 있었지만, 역시 그런 모든 것 보다는 그냥 낯설음 자체가 소중했다.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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