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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I 로스팅

AI 시대 일의 구조 재설계에 대한 생각

유발 하라리의 경고

by 경영로스팅 강정구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기업 운영에 스며들면서 ERP, CRM, SCM 같은 세 글자 시스템들이 조직에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당시의 핵심 키워드는 ‘업무 자동화’였지만, 본질적인 화두는 ‘Business Process Renovation’, 즉 업무 흐름 자체를 디지털 시스템에 맞춰 재설계하는 일이었습니다. 기업들은 수작업으로 진행되던 회계, 재고, 고객 관리를 시스템 중심으로 통합해 효율성과 일관성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도입은 단순한 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사적 자원 관리(ERP) 시스템은 모든 부서의 언어와 흐름을 통일해야 했고, 이는 곧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업무 프로세스는 정형화되어야 했고, 개인의 방식은 시스템의 로직에 맞게 바뀌어야 했습니다. 시스템 중심의 일 방식이 조직 문화를 규정하던 시기였습니다.

AI 시대에 접어든 지금, 우리는 다시 ‘업무 재구성’이라는 익숙한 화두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변화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시스템에 맞췄다면, 이제는 시스템이 사람의 흐름과 맥락을 읽고 따라갑니다. AI는 업무를 정형화하지 않고, 오히려 비정형적인 흐름을 포착해 유연하게 대응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 ERP 시스템은 회계 처리를 위한 정해진 규칙을 따랐고, 사용자는 매뉴얼대로 입력해야 했습니다. 반면, 지금의 AI 에이전트는 회계 보고서를 분석하고, 주요 리스크를 요약하며, 경영자가 알아야 할 핵심만 추려 제공합니다. 같은 업무이지만, 수행 방식과 정보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구의 변화가 아니라, ‘인지 구조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AI 기반 업무 재구성은 자동화의 수준을 넘어, ‘업무 해석 구조’까지 개입합니다. 단순 반복 업무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작업이 더 중요한지, 어떤 흐름이 병목인지, 어떤 결정이 선행돼야 하는지를 스스로 판단합니다. 즉, AI는 업무의 ‘내용’보다 ‘순서와 구조’를 설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RP가 규칙을 따랐다면, AI는 우선순위를 설계합니다.

이러한 전환은 조직 설계에도 큰 변화를 요구합니다. ERP 시대에는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가 시스템 프로세스에 맞춰 설계됐다면, AI 시대에는 역할 단위가 ‘작업 흐름’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마케터라는 포지션보다, ‘콘텐츠 기획–작성–배포–성과 분석’이라는 작업 플로우가 중심이 되고, 여기에 사람이든 AI든 역할을 배정하는 방식이 유효해집니다. 일의 단위는 ‘사람’에서 ‘기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특히 스타트업이나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조직에 기회가 됩니다. 과거처럼 거대한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아도, GPT, Claude, Perplexity 같은 LLM 기반 에이전트를 조합하면 소규모 팀도 고도화된 오퍼레이션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비싸고 정교한 시스템을 갖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맥락에 맞게 연결하고 흐름을 설계할 수 있느냐입니다. 기술보다 ‘조직 설계 역량’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입니다.

동시에, 이 전환은 우리가 익숙했던 KPI와 성과 측정 방식에도 도전장을 던집니다. 시스템이 자동화된 흐름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다면, 더 이상 사람 단위의 ‘시간’이나 ‘투입량’으로 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AI가 개입한 일은 ‘누가 했느냐’보다 ‘어떻게 연결되었느냐’가 성과의 기준이 됩니다. 새로운 업무 구조에는 새로운 성과 지표가 필요합니다.

인터넷 시대의 업무 재설계는 기존 프로세스를 디지털화하고 시스템에 맞춘 조직이 경쟁력을 얻었습니다. 반대로 변화에 저항하거나,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한 조직은 경쟁에서 밀려났습니다. AI 시대의 업무 재설계는 기술을 얼마나 잘 도입했느냐보다, 얼마나 유연하게 구조를 설계하고 AI와 사람 간 협업 흐름을 조직 안에 녹여냈느냐가 관건입니다. ‘툴을 쓰는 조직’이 아니라, ‘흐름을 설계할 줄 아는 조직’이 살아남습니다.

결국, AI 시대에 필요한 경쟁력은 명확합니다. 빠른 도입보다 더 중요한 것은, AI를 사람의 언어와 맥락에 맞게 엮어내는 ‘실행 가능한 구조 설계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란, 단순히 툴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업을 AI가 맡고 어떤 판단은 사람이 해야 할지를 구분하고, 이 흐름이 실제 업무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도록 조율하는 역량입니다. 마치 건축가가 자재보다 공간의 쓰임새를 먼저 설계하듯, AI 시대의 실무자도 기술보다 구조를 먼저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기술은, 결국 우리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이 경고는, 지금 우리가 기술보다 먼저 구조를 설계해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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