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규제를 막기 위한 권력의 개입과 무너진 원칙
2025년 5월 9일, 미국 저작권청은 인공지능(AI)이 저작물을 학습에 사용할 수 있는 법적 기준을 담은 108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공정 이용(fair use)의 네 가지 판단 기준을 제시하며, 특히 상업적 목적의 대규모 학습이 기존 창작물의 시장을 침해할 경우 공정 이용을 넘는다고 명확히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기술 발전과 창작자 권리 보호 사이의 균형을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AI가 데이터를 어떤 목적으로 활용하는지, 어떤 유형의 저작물을 사용하는지, 결과물이 원작과 얼마나 유사한지, 그리고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이 네 가지 기준은, AI 시대에 다시 써야 할 공정 이용의 경계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발표 하루 만에 사실상 폐기되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저작권청장 시라 펄머터(Shira Perlmutter)를 전격 해임했습니다. 이틀 전에는 의회도서관장 칼라 헤이든(Carla Hayden)도 물러났습니다. 표면적인 해임 사유는 다양성과 도서 선정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AI와 저작권 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되돌리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미국 저작권청과 의회도서관은 지식 정책의 핵심 축을 이루는 기관입니다. 특히 의회도서관 산하 의회조사국(CRS)은 의원들의 질의, 정책 분석, 내부 보고서를 정리하며 입법 활동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해 왔습니다. 이 기관들의 수장을 교체하고, 법무부 출신 인사들로 요직을 재편한 것은 단순한 인사 교체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도서관장 후임으로 자신의 전 변호사이자 법무차관이던 토드 블랜치를 임시 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인사는 상원 인준도 거치지 않았고, 이후 도서관과 저작권청의 주요 보직에도 법무부 인사들이 잇따라 임명되었습니다. 정책과 법률 해석을 담당하는 기관의 중립성이 무너지고, 권력의 논리에 따라 재구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인 삼권분립에 심각한 위협을 가합니다. 입법부의 정보 흐름을 행정부가 통제하게 되면, 견제와 균형은 무의미해지고, 의회는 행정부의 연장선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누가 어떤 법안을 읽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백악관이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체계는 ‘감시 국가’가 아닌 ‘감시 행정부’의 초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AI 규제 영역에서도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공화당은 예산 조정 법안에 지방정부의 AI 규제를 10년간 금지하는 조항을 몰래 삽입하려 했습니다. 이 사실은 폭로 전문 매체 404미디어에 의해 드러났고,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40개 주의 법무장관들이 즉각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지방정부가 상식적인 규제를 만들 수 없도록 막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여러 주는 AI 기술에 대응해 자체적으로 규제를 마련하고 시행 중입니다. 딥페이크 방지법, AI 기반 의료 알림 의무화 등은 그 사례입니다. 연방 차원의 AI 규제 입법이 수년째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이 공백을 권력 개입으로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이 일련의 결정은 디지털 패권 확보를 위한 전략적 조치일 수 있습니다. 그는 2025년 초, AI 인프라에 5,0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하며 미국 내 AI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AI 기업들이 공공 데이터를 자유롭게 학습할 수 있어야 기술 개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는 그 계획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희생된 것은 제도의 독립성과 법의 원칙입니다. 저작권청이 제시한 엄격한 기준은 기술 발전의 장애물로 간주되었고, AI 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법적 견제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이 해임은 그 정점에서 이뤄진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산업계도 이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자본력을 갖춘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데이터 구매를 통해 법적 리스크를 회피하고 있지만, 중소 AI 스타트업은 점점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규제가 완화될수록 기술력보다 정치와 자본의 크기가 산업의 승패를 좌우하게 됩니다.
이 여파는 국외로도 번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사실상 글로벌 AI 규제의 방향타 역할을 해왔으며,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해석을 참고해 자국 제도를 설계합니다. 미국이 공정 이용 범위를 느슨하게 해석한다면, 한국의 창작자와 콘텐츠 산업은 보호 장치 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한국은 웹툰, 음악, 드라마 등 AI 학습에 유리한 디지털 콘텐츠를 다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 대응력과 국제 협상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 기업들이 한국의 창작물을 학습에 자유롭게 활용하면서도 그에 대한 보상이나 통제는 회피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산업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주권의 문제입니다.
창작자에게 이번 사건은 분명한 경고입니다. 당신의 작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AI가 학습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용이 정당한지, 당신의 권리가 보호받고 있는지는 누구도 명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제도가 없다면, 창작은 곧 자원이 됩니다. 권리가 아니라 연료가 됩니다.
기술은 진보합니다. 그러나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해 설계되고, 어떤 기준 아래 작동할 것인지는 사회가 결정해야 합니다. 시라 펄머터는 그 경계를 지으려 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 경계를 지워버렸습니다.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은 단지 AI의 규칙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제도의 윤리적 기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