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압박 vs. 데이터 주권
미국 빅테크의 한국 지도 국외 반출 이슈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구글은 2011년과 2016년에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국가 안보와 정보 유출 우려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구글은 보안시설 블러 처리를 약속했지만, 국내 서버를 두지 않는 점이 걸림돌이 됐다.
2023년에는 애플이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을 요청했다. 애플은 애플페이, 카플레이, 나의 찾기 등 서비스 고도화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정부는 같은 이유로 이를 불허했다. 이 과정에서 고정밀 지도 데이터는 단순한 기술 자료를 넘어 국가 핵심 자산이라는 인식이 더욱 공고해졌다.
2025년, 구글과 애플은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 시점에 지도 반출을 재요청했다. 구글은 2월 세 번째 요청서를 제출했고, 정부는 8월 11일까지 심사 기한을 설정했다. 애플은 6월 두 번째 요청서를 내며 국내 서버 보유와 보안조치 수용을 강조했고, 정부는 9월 중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국회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2025년 6월, 공간정보관리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개정안은 고정밀 지도(1:25,000 미만)의 국외 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저정밀 지도는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와 보안조치를 전제로만 반출을 허용한다.
(1) 국외 반출 찬성 측은 고정밀 지도 반출이 경제적 이익과 산업 경쟁력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은 반출 허용 시 2027년까지 관광수입 226억 달러(약 31조 원), 관광객 680만 명 추가 유입, 8,000개 신규 일자리, 3조 9,000억 원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은 자율주행, 스마트시티, 글로벌 플랫폼 역차별 해소 효과도 논거로 내세운다.
(2) 반대 측은 국가 안보와 데이터 주권 침해 가능성을 중대하게 본다. 구글은 일본 등 해외 데이터센터 활용과 블러 처리를 통한 보안 방침을 유지하지만, 국내 서버 미보유로 데이터 통제권 상실 우려는 해소되지 않았다. 애플은 국내 서버 보유와 보안조치 이행을 약속하며 티맵과의 협력안을 내세웠지만, 외부 의존성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이번 논란은 국내 지도 플랫폼과 시장 생태계의 전략적 가치를 다시 조명하고 있다. 네이버맵과 카카오맵은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데이터 주권과 기술 자립의 기반이다. 6,000여 국내 공간정보 기업과 스타트업은 공공 데이터와 자체 지도에 의존하며 시장을 지탱하고 있고, 업계는 구글 지도 반출 허용 시 생태계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미국의 통상 압박은 과거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집요하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 제한을 비관세 장벽으로 규정하며 매년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 등 미국 ICT 업계도 민관이 합동으로 한국 정부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를 자국 ICT 기업에 대한 부당 규제로 보고, 규제 철폐를 한미 통상 협력의 조건으로 내세운 바 있다.
이런 압박과 논란 속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 절충안은 데이터센터 투자 유치일 것이다. 구글이 태국(약 10억 달러)과 말레이시아(약 20억 달러)에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며 아시아 내 거점을 확장하는 가운데, 한국도 이를 유치해 협상력을 높이자는 주장이다. 이는 민감 데이터의 자국 보관이라는 명분을 지키면서 글로벌 기업의 투자와 AI·클라우드 산업 기반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다.
정부는 2025년 8월과 9월 구글과 애플의 요청에 최종 답을 내릴 예정이다. 이번 결정은 단순한 데이터 반출 허용 여부를 넘어선다. 지도 데이터는 디지털 영토의 경계선으로 간주되며, 이 결정은 한국의 데이터 주권 방향과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는 시험대가 된다.
AI 시대의 데이터 주권은 국가 기술 자립과 산업 주권의 핵심 기반이다. 지도 데이터는 AI 학습, 자율주행, 스마트시티, 디지털 트윈 등 미래 산업의 핵심 자원이다. 이번 결정은 한국이 그 경계를 스스로 설계할지, 아니면 미국 플랫폼에 종속될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