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 죽어있었어요.

100M, 2025.10.08

by 두부

내 직업은 요리사다.


이 일을 하겠다고 처음 마음먹었을 때, 미래는 그저 벅찬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대학을 조리과로 진학해 요리를 배우면서 요리가 점점 좋아졌다.


처음으로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을 땐, 내가 몸담고자 한 업계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일매일이 보람찼다.

하루를 시작하며 스토브에 불을 붙이던 나는, 감히 “열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믿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나만 열심히 하면 앞으로 닥쳐올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해가 갈수록, 연차가 쌓이고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그 믿음은 점점 흐려졌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생각보다 지극히 일부분이었으며, “혹시 재능이 있을지도?”라는 희미한 자신감은 당면한 현실 앞에 서서히 바스러졌다.


나는 핸디캡을 달고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진짜 재능이 있는 사람, 무서울 만큼 노력하는 사람, 의지와 환경이 모두 갖춰진 사람,
그리고 처음부터 출발선과 결승선이 아예 달랐던 사람들.


보고, 듣고, 겪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종종 나 자신이 작아지는 걸 느꼈고, 점점 나아갈 방향을 잃어갔다.


좋은 얘기만 하던 지인들과의 자리에서도 언제부턴가 연봉, 결혼, 안정적인 생활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오갈 때면 나는 또 한 번 작아졌다.


세상은 점점 평범한 내게 ‘열의’가 아닌 ‘생존’을 요구했다.


식재료를 다듬으며 떠올린 건 맛의 균형이 아니라, 이번 달 대출이자였다.
접시에 담아내는 건 요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불안이었다.

썰어내는 건 식재료가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나의 희미한 자신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요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해 하고 있었다.



애매한 재능과 적당한 노력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허우적거렸다.
한때 내 안을 가득 채웠던 열의와 즐거웠던 추억은
이젠 성가신 짐처럼 다리를 무겁게 만들 뿐이었다.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여러 감정들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채 방치되었다.


위에 적은 우울한 이야기는, 수년 전 내가 한참 방황하던 시절의 생각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래된 기억을 다시 추억하게 만든 건, 지난주 한국에서 개봉한 한 애니메이션이었다.



vVGRUc.jpg 우오토의 100M 포스터


우오토의 '100M'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100M'는


단거리 육상선수 '토가시'의 어린 시절부터 사회인이 되어서까지의 일대기를 그린다.


선천적으로 발이 빨랐던 토가시는 자신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늘 훌륭한 성적으로써 이를 증명해 냈다.


그러던 중 전학생 코미야의 등장으로 토가시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처음으로 느껴본 패배의 두려움, 자신의 재능과 위치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하고


결국 코미야에 의해 생에 처음으로 맛보는 패배에 토가시는 완전히 좌절한다.



1등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지?



목적을 잃고 슬럼프에 빠져 방황하며 1등이 당연한 선수에서 시들시들한 선수가 된 토가시.


고교 육상, 사회인 육상을 거치며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사건을 통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열의를 모두 잃어버린 채, 현실에 적응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얻어내기 위해 힘을 쓰던 토가시는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을 죽어있었다"라고 말하며, 무언가를 깨닫고


승패를 넘어선 의미를 찾기 위해, 다시 100M를 전력으로 달리기 위해 트랙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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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미터 단거리 육상이라는 소재에 담긴 한 청년의 이야기는,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새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보거나, 내가 생각했던 내가 타인에 의해 부정당하는 경험은 육상 경기뿐 아니라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나의 재능에 대한 의심,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한 고민, 의미와 목적, 주변의 평가까지.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나름의 해답을 찾아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여러 사람 덕분에 후자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끝을 알 수 없고, 당장 바꿀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고, 그로 인해 의미 없는 타인과의 비교를 멈출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하나하나 실천하기 시작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을 다시 좋아하기로 했다.


물론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처음 적었던 우울한 생각의 원인들은 여전히 곁에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다시 맛의 균형을 떠올리며, 손질한 식재료를 썰어 접시에 담는다.


엉망진창인 페이스지만, 나는 오늘도 나의 100미터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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