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스트 슬램덩크(The First Slam Dunk, 2023)
나는 만화를 아주 아주 좋아한다.
그 나이 먹고 아직도 만화가 좋냐, 철 좀 들어라 하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디즈니 픽사같은 회사의 애니메이션은 그런 인식이 잘 없는데, 유독 소년만화, 일본 애니메이션 쪽은 아직도 시선이 곱지는 않은 것 같다.
나도 중학교 2학년 정도 될 때까지는 만화를 유치하고 애기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시절 어렸던 나의 소년만화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준 작품이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슬램덩크”였다.
슬램덩크의 마지막 경기 마지막 골이 들어가는 순간에 느꼈던 전율은 아직도 생생하다. 만화책이라 음성도, 효과음도,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림만 있을 뿐이었지만 그 순간은 손바닥 만한 만화책을 통해서 경기장 안에서 북산과 산왕의 경기를 지켜보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었다.
연재 종료로부터 20년이 훌쩍 넘은 시간, 내가 처음 슬램덩크를 접한 후로도 십수 년이 더 흐른 후에 극장가에서 나를 포함한 모든 슬램덩크 팬들을 놀라게 한 소식이 들려왔다. 슬램덩크의 마지막 경기, 바로 그 “산왕전”을 영화화 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한다는 것이었다.
밈화 되거나 짤로 많이 돌아다녀서 슬램덩크는 몰라도이 장면은 안다 싶은 명장면들이 전부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산왕전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 채로 개봉날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영화가 개봉했고, 퇴근 후 심야영화로 관람했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과정은 어떤지 내용을 전부 알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는 소름이 돋았다. 산왕전의 경기장면과 송태섭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과거회상을 적절하게 섞어 빌드업을 한 전개 후 터뜨리는 부분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BGM과 효과음도 크게 한몫했고, 특히 마지막 20초 부분의 연출은 나의 이 부족한 필력으로는 표현을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숨 막히게 긴장됐다. 꼭 한번 직접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러닝타임의 절반정도를 차지한 이번에 새로 추가된 송태섭의 이야기는 눈물을 훔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영화의 주인공은 “천재 강백호(사쿠라기 하나미치)”도 아니고, “불꽃남자 정대만(미츠이 히사시)”도 아니었다.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 중 절반가량의 시간을 할애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바로 본편에서 가장 서사가 얕았던 북산의 7번 포인트가드 “송태섭(미야기 료타)”이었다.
굵직한 서사와 명대사가 즐비한 슬램덩크에서 송태섭은 그다지 눈에 띄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작중 전경기 풀타임 출전이라는 기록이 무색하게 이렇다 할 서사도, 다른 북산 멤버들 다 하나씩 있는 만화책 페이지를 하나 또는 두 개 전체를 사용한 임팩트 있는 명장면도 없이(손바닥의 도내 no.1 정도..?) 채치수 다음으로 팬덤이 거의 전무하다 싶은 캐릭터였다.
그 당시 내 기억에도 송태섭은 사람이 불량하고 가벼운, 브로콜리 같은 머리를 한 패스가 특기인 작고 재빠른 포인트가드 정도로만 기억에 남았다. (드리블하는 모습이 멋지긴 했다)
당연히 나의 원픽도 송태섭이 아닌 정대만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녹초가 될 때까지 코트를 뛰어다니며, 팔이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지쳤음에도 망설임 없이 3점 슛을 쏘아 성공시키는 모습 자체가 너무 멋있었다.
성인이 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한 후 다시 본 슬램덩크에서도, 여전히 나는 정대만이 제일 좋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물론 멋있지만 그 정대만이라는 캐릭터의 서사가 그때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중학 mvp출신으로 농구선수로서 최고로 빛나던 순간 이후 찾아온 슬럼프를 겪고 코트를 떠나게 되고.
오랜 시간 방황하다가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다시 코트로 돌아와 농구를 다시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이,
남들이 서로 경쟁하며 라이벌 구도를 만들 때 홀로 과거의 자신과 싸우며 헛되이 보낸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그 이후에 펼쳐진 산왕전에서 보여준 녹초가 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서 그가 왜 포기하지 않았는지, 포기할 수 없었는지를 생각하며 보니 어린 시절에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난 후에 이번 작품의 주인공인 송태섭에게서, 그 시절 정대만에게서 느꼈던 감동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껄렁껄렁하고 불량한 언행을 보였던 이유나 항상 건방져 보일 정도로 여유를 보였던 것, 그에게 산왕공고와의 경기가 갖는 의미와 결코 지고 싶지 않았던 남다른 이유를 그의 가정사를 포함한 과거 회상을 통해 풀어낸다.
경기 내내 과거사와 경기장면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송태섭이라는 인물에게 농구가 갖는 의미, 어린 시절부터 속절없이 짊어지게 된 죄책감. 형과 직접 약속한 적은 없지만 어쩐지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되어버린 일...
과거사를 통해 빌드업을 쌓다가 전반 내내 고전했던 산왕의 존 프레스를 후반 막바지에 다시 걸어올 때 단번에 뚫어내는 송태섭을 통해 폭발시킨다.
연출과 BGM타이밍이 시너지를 내면서 보는 사람의 심장을 터뜨리고, 모두가 아는 그 대사 한 줄 없는 “마지막 1분” 의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하지만 장르가 장르다 보니 여러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팬의 입장에선 좋아하는 명장면이 편집되었다거나 하는 아쉬움이 있고 (팬이기 때문에 보이는 디테일이나 들리는 대사도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 입장에선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진행될 수밖에 없는 영화이기 때문에 다소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그런 부분에서 본편에서 서사가 부족했던 송태섭을 이용해 아얘 새로운 이야기를 한 부분은 똑똑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나는 만화를 아주아주 좋아한다. 슬램덩크를 통해 소년만화에 입문하고 지금까지 많은 만화를 보며 적지 않은 위로와 긍정적인 자극을 받았다. 특별히 재밌는 일 없는 삶에 큰 활력소가 되어주었고, 나는 앞으로도 철없이 만화를 좋아할 것이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줬던 아주 특별한 만화인 슬램덩크.
나에게도 언젠가 영광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이만 줄인다.
시간이 된다면 스토리 리뷰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