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르뉴, 오르시발(Orcival)
작년 바스티앙 회사 동료들이 결혼 선물로 스마트박스를 선물해 주었다. 박스 안에는 프랑스의 호텔과 비앤비가 표기된 안내 책자가 들어 있는데, 그중 어디든 하루 머물 수 있는 무료 숙박권인 셈이다. 책자를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문득 짙은 회갈색의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호텔 사진에 시선이 머문다. 어째서 나는 중세풍의 어두운 건물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가. 이 마을은 또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궁금증이 밀려왔다. 남프랑스의 밝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꿈꾸던 남편은 나의 반강요에 못 이겨 결국 오베르뉴 오르시발(Orcival)의 호텔에 숙박권을 쓰기로 결정하고, 우리는 금요일 저녁 도시락을 싸서 서둘러 떠났다.
춥고, 음울하고, 또 너무나 조용해서 눈 내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던 작은 마을.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오베르뉴의 오르시발(Orcival).
완연한 겨울이라고 하기엔 2월 말이라는 시기적 어감이 너무 절망적이다 싶지만, 그랬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밤새 함박눈까지 내려 이 작은 마을에 며칠 고립되는 건 아닌가 걱정도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으면 또 어떠랴. '장미의 이름' 같은 대작은 못되더라도 그 비스름한 얄팍한 소설 하나쯤은 끄적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을 중심에 12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있고, 그 뒤편엔 언덕으로 올라가는 작은 길이 나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길인 것이다. 프랑스 어느 마을이나 그렇듯 교회를 중심으로 베이커리가 있고, 작은 슈퍼마켓이 있고,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이 있었다. 커튼을 젖히면 바로 보이는 오르시발의 회색빛 성당은 움베르토식의 무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일찍 해가 진 이 작은 마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 내려가 오베르뉴 지방의 음식 트뤼파드(Truffade)를 먹고, 와인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트뤼파드는 얇게 썬 감자에 오베르뉴 지방의 치즈를 곁들여 오븐에 구운 음식으로, 치즈와 감자가 만나니 맛있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지만 너무나 무거웠다. 게다가 디저트는 크렘 브륄레.
숨쉬기 힘든 배를 붙잡고 밤 산책에 나섰다. 낮에 보았던 노트르담 성당이 어둠 속에서 무겁게 그 존재를 드러냈다. 교회 주변을 배회하다가 추위와 견딜 수 없는 정적에 호텔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오래된 미국 영화의 배우들은 더빙된 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이 마을까지 오게 된 내 모습이 불어로 얘기하는 미국 배우들 만큼이나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았다.
교회 바깥벽에 매달려 있던 낯선 도구들. 흡사 고문 도구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것들이 왜 성당 벽에 있는 것일까. 이 성당에는 1170년에 만들어진 검은 성모상이 있다. 당시 수갑을 찬 죄수들이 이 검은 성모상에게 기도를 했는데, 갑자기 기적이 일어나 죄수들의 수갑이 열리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죄수들은 그들의 몸을 옥죄고 있던 것들을 성당 벽에 내걸었다. 사실 검은 성모상의 기적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검은 성모상은 아주 작은 교회에 있었다. 그때 순례자들이 이 교회 앞을 지나가면서 많은 기적을 경험했단다. 그래서 한 석공이 검은 성모상을 위한 큰 교회를 지으려고 했는데, 지을 장소가 너무 고민되는거다. 그러자 석공의 마음 속에 외침이 들려 왔다.
"가까이 있는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망치를 네 앞에다 던져라.
그 망치가 떨어진 곳이 바로 성소(Sanctuaire)이다."
결국 이 성당은 한 석공의 망치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된 셈이다. 아득한 시절의 이야기지만, 신(神) 중심이었던 중세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종교가 삶을 지배했던 시대에 검은 성모상이 일으켰다는 기적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신화가 된다. 그 신화에 나도 슬그머니 동참을 했다. 1유로를 내고 작은 초 하나를 사서 모두가 행복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마음 속의 의심은 여전히 지우지 못한 채로.
성당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다. 길이 꽤 미끄러웠다.
마을에 눈이 녹기 시작해 얼른 차를 몰았다. 생각보다 기온이 높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시 쏟아지는 눈과 구불구불한 산길, 그리고 핸드폰도 터지지 않아 긴장은 배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작년에 브레이크가 고장 났었던 우리 말썽 많은 차에게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번만 버텨 달라고.
1유로의 초가 기적을 일으킨걸까. 운이 좋게도 제설차를 만나 꽁무니를 졸졸 따라서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제설차가 바로 앞에 있으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눈 쌓인 절경.
근처 호숫가에서 잠깐 쉬기로 하고 우리는 샹봉호수(Lac chambon)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부모님께 무사하다는 연락을 드렸다. 시부모님이 근처에 멋진 성이 있다고 추천해 주셔서 또 무작정 차를 몰았다.
특별한 계획 없이, 마음이 내키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