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âteau de Murol
곧 진눈깨비가 내릴 것 같은 무거운 하늘을 애써 외면하고 우리는 뮤롤 성(Château de Murol)으로 향했다. 기사도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잿빛 하늘과 안개에 몸을 숨긴 성의 일부가 그 모습을 드러내자 마치 중세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반쯤 허물어져 뼈대와 살이 애매하게 남은 성에는 매표소의 직원을 제외하면 우리 둘밖에 없었다. 차갑고 물기가 많은 공기 속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것이 날씨 탓인지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래된 시간의 무게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두려움이 앞서 되돌아갈까 망설였지만, 호기심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 직접 보고, 그 시간을 만지고 싶었다. 변색되고 마모되어 이끼가 자란 돌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12세기의 아득한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오베르뉴, 퓌 드 돔의 뮤롤 성(Château de Murol)
샹봉 호수(Lac Chambon)에서 뮤롤 성 찾아가는 길.
짙은 안갯속에서 성의 일부가 고개를 내민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미처 녹지 못한 응달의 눈길이 미끄러웠다.
부서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남은 성 벽을 따라 올라가면 유골이 있는 방이 우리를 맞이한다. 지하 예배당에서 발견된 이 유골은 1380년 성을 재건한 기욤 드 뮤롤(Guillaume de Murol)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요새였던 이 곳에 방을 만들고, 두 번째 예배당을 지어 성을 확장시켰다.
숨 막힐 듯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옛날 감옥으로 사용한 방이 나오는데, 사람이 다가가면 자동으로 반응하는 목소리 감지기 탓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감옥 안에 사람처럼 자리를 잡고 앉은 죄수 마네킹도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화를 면한 뮤롤 성은 감옥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도둑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처음 샹브르(Chambres)와 뮤롤(Murol) 가문이 요새로 지은 이 곳이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귀족들의 성이었다가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 마침내 샤브롤(Chabrol) 가문의 기증으로 퓌 드 돔 주의 소유가 된 것이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마네킹을 뒤로하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안개가 자욱한 마을이 눈 앞에 펼쳐진다. 새끼 염소의 울음소리가 축축한 공기를 타고 진동했다.
이제는 활동을 멈춘 화산이 만들어낸 독특한 지형이 투박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저 뜬금없는 구멍이 향하는 곳은 성 밖, 낭떠러지다. 중세 시대의 화장실인 것이다. 구멍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니 잠깐 앉아볼까 하는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미로 같은 성을 한참 둘러보고 밖으로 나가니 당시 고문 도구들이 재현되어 있었다. 바스티앙이 단두대에 목을 집어넣었다. 아찔한 생각이 스쳤다. 전쟁과 침략을 일삼던 수 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까. 인간의 광기는 중세 시대나 오늘날이나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진득한 시간의 무게를 마주하고, 여기 서 있는 나를 돌아본다.
거친 땅 위에서, 죽은화산의 풍경들을 뒤로한 채 내 작은 자취를 남긴다.
Le lendemain, à la nuit tombante, j'arrivai au château de Murol. La vieille forteresse, tour géante debout sur son pic au milieu d'une large vallée, au croisement de trois vallons, se dresse sur le ciel, brune, crevassée, bosselée, mais ronde, depuis son large pied circulaire jusqu'aux tourelles croulantes de son faîte.
-Guy de Maupassant <Contes du jour at de la nuit>-
단편집에서 뮤롤 성을 언급한 기 드 모파상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다음 날, 해질 녘 나는 뮤롤 성에 갔다. 요새는 세 개의 협곡이 교차하는 큰 협곡의 한가운데,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대한 타워 형태의 오래된 그 요새는 울퉁불퉁하고 갈라진 갈색 표면으로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넓은 원형의 밑바닥부터 무너져가고 있는 정상의 작은 탑까지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