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길의 시작

Le Puy-en-Velay

by 경계인


오래된 화산과 치즈, 그리고 미슐랭 가이드와 타이어로 유명한 오베르뉴는 프랑스 중남부에 위치해 있는데, 그 주도는 클레르몽페랑이다. 클레르몽페랑에서 두 시간 정도 남동쪽으로 달리면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독특한 지형을 가진 작은 도시가 나온다. 두 개의 커다란 바위산 위에 성모 마리아 상, 생 미셸 예배당이 자리한 르 퓌 엉 블레(Le Puy-en-Velay)가 그곳이다.


르 퓌 분지 위에 봉우리가 솟아있는 모습이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를 떠오르게 했다. 그만큼 이 도시가 비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16미터 높이의 붉은 성모 마리아 상은 말할 것도 없고, 82미터 용암 위에 지어진 생 미셸 예배당은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음울하고 미스터리한 기운을 내뿜었다.


200개가 넘는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10세기에 세워진 예배당이 있다.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예배당의 기둥을 쓰다듬어 본다. 오래된 무언가를 마주할 때, 만져보고 싶은 그 욕망은 오래된 사물이 가진 시간을 속성으로 느껴보고픈 환상에 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천 년의 시간이 스르르륵 하고 스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냥 차가운 돌 덩어리. 색이 바랜 사물의 그 시간들을 상상해보는 행위 자체야말로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아닐까.





너무나 종교적인 마을, 르 퓌 엉 블레(Le Puy-en-Velay)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 르 퓌 엉 블레는 이 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중세시대에 기독교 순례자들의 중요한 순례길 중 하나로서, 순례자들은 조개껍데기와 지팡이를 들고 1000km가 넘는 길을 걸었다. 조개는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었을 때 조개껍데기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데서 연유해 순례의 상징이 되었다. 순례길 곳곳에서 이 조개 표식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노트르담 뒤 퓌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u Puy)으로 향했다. 대성당 입구의 커다란 정문을 놔두고 성당 뒤편의 좁은 골목길들을 헤매다 마침내 들어선 이 성당이, 다음날 정문으로 다시 방문할 때까지 나는 같은 곳인 줄 모르고 있었다. 지독한 방향치이기도 하거니와, 오밀조밀한 골목의 자갈길을 집중해서 걷고 있으면 이곳이 어떤 역사를 가진 곳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어느덧 나는 12세기의 한 순간으로 이동해 마을의 아낙네로서, 혹은 이제 막 순례를 시작하는 순례자로서 울퉁불퉁한 길을 하릴없이 걷고 있는 것이다.




IMG_6385.jpg
IMG_6383.jpg
IMG_6380.jpg



12세기 말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에는 유명한 검은 성모 마리아 상이 있다. 이 성모 마리아 상을 처음 봤을 때, 화산 지대였던 오베르뉴 지역의 특성상 화산석으로 만들어져 검은색인 줄 알았다. 클레르몽페랑의 성당과 건물들 역시 화산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두운 색을 띤다. 그러나 삼나무를 깎아 만든 이 성모 마리아 상은 시간이 오래 흘러 검은색으로 변했고, 그 후 프랑스혁명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지금의 성모상은 17세기에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IMG_6338.JPG
IMG_6330.jpg
IMG_6343.jpg
IMG_6391.jpg



성당을 나와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미로처럼 좁다란 길이 뒤엉킨 이 마을에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길을 잃고, 배가 고프면 아무 베이커리에나 들어가 빵과 커피를 사 먹었다. 저 멀리 우뚝 솟은 바위산 위에 붉은 성모상과 생 미셸 예배당이 보였다.


1856년 크림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가 러시아의 대포 213개를 녹여서 만든 노트르담 드 프랑스.

그래서인지 여태껏 보아왔던 성모상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16미터의 높이가 주는 위상과 붉은 기운이 자유의 여신상을 떠오르게 한다.



IMG_6414.jpg
IMG_6313.jpg
IMG_6346.jpg
IMG_6317.jpg
IMG_6416.jpg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던 생 미셸 예배당. 82미터 용암 위에 세워진 이 예배당에 가기 위해서 나는 고소공포증마저 이겨내야 했다. 돌벽 사이로 난 구멍을 통해 보이는 집들이 점점 작아질 때쯤, 우리는 천 년의 세월과 마주했다.



IMG_6429.jpg
IMG_6433.JPG
IMG_6453.jpg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매일 이 가파른 계단을 올랐을 사람들과 순례자들의 간절함을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원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되었을까. 인식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을까.

산티아고 길의 시작점에서 도리어 생각이 많아지는 나를 본다.

그래, 긴 여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