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의 색깔

모르방(Morvan)의 가을

by 경계인



사람마다 어떤 특정한 풍경이 주는 위안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힘이 들 때 바다를 보러 가거나, 산에 오르기도 한다. 내겐 부르고뉴(Bourgogne)의 평야가 그렇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남편과 나는 부르고뉴로 로드트립을 떠났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본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밭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기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부르고뉴엔 갈 때마다 비가 내렸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부르고뉴의 색깔은 푸른 잿빛. 샛노란 유채꽃마저 슬픔이 깃든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묘한 기운의 색깔이다.

주로 봄에 부르고뉴 여행을 했으니 가을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졌다. 남편의 눈빛을 보니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급히 호텔 예약을 하고, 주말을 이용해 여행에 나섰다. 어둡고 푸른 부르고뉴의 이미지를 여전히 마음에 품은 채로.





모르방(Morvan)의 넓은 평야를 끼고 끝없이 이어진 도로를 달린다.



리옹에서 차로 세 시간 여를 달리면 나타나는 넓은 평야. 프랑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기도 하고, 작은 집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겐 이 곳이 매력적으로 와 닿는다. 리옹에서 떼제베를 타고 파리로 갈 때, 마꽁의 언덕을 지나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부르고뉴의 평원을 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들이 말끔히 사라지는듯한 느낌이 든다. 부르고뉴산 화이트 와인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부르고뉴(Bourgogne)라는 단어의 발음이 주는 알 수 없는 편안함도 무작정 이 지역을 편애하게 만드는 요소들 중 하나인 것이다.


부르고뉴에는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들이 있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은 자연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평원과 샤롤레(Charolais)라고 부르는 이 지역의 소들을 마음껏 관찰하는 것. 그리고 걷기.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금방 목적지에 도착하겠지만, 로드트립의 매력은 길 위에서 생각지도 못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애써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길만을 골라 달렸다. 때론 참을 수 없이 멀미가 나는 순간도 있었으나 그럴 때마다 자연은 또 다른 경이로움을 선사해 어지럼증을 단박에 상쇄시켜버렸다.

여름 바캉스는 끝이 났고, 그렇게 더위도 함께 물러가 버린 도로는 한산했다. 그리고 모르방의 평원은 지난봄의 모습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그 얼굴을 드러냈다.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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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든 평야에 퇴색된 초록 이파리들이 어우러져 모르방의 가을을 연출하고 있었다. 소떼를 보자마자 나는 차를 세웠다. 전형적인 도시 여자인 나는 소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소의 육중한 몸, 선한 눈, 분홍빛 코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소가 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소가 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방목해 키우는 이 지역의 소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너른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으며 자란 소는 정해진 도축업자에 의해 도축된다.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비좁은 케이지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테르낭(Ternant)이라는 마을에 잠깐 멈춰 아주 오래되었다는 교회의 삼단화를 구경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지난봄의 풍경과 지금의 부르고뉴를 동시에 떠올려 보았다. 너무도 다른 이미지들이 내 안에서 부딪혔다. 어느덧 자연은 하나의 계절을 지나 각자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노랗게 만개했던 유채는 이제 가을의 임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소들은 최선을 다해 풀을 뜯고, 최대한 많이 잠을 잤다. 모든 것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연은 가장 솔직한 민낯으로 내게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최선을 다해 현재에 임할 것을.



지난 봄의 부르고뉴





남편이 멍한 나를 불러 깨웠다. 트레킹을 하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한 시간을 더 달려 오-폴랭(Haut-Folin)에 도착했다. 운동화로 갈아 신고 물과 도시락을 챙겨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다.

키 높은 나무들 사이로 뾰족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곰이나 늑대라도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은근히 기대를 했지만, 다람쥐 한 마리도 구경하지 못했다. 숲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고작 삼십여 분을 걸었을까. 벌써 배가 고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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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 시간을 걸었다. 다시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우리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 쉬고 싶었는데 남편이 차를 몰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일몰을 보기 위해서였다.





푸른 잿빛으로 기억하던 부르고뉴의 이미지는 이제 붉은 기운마저 더해져 한층 다채로운 빛깔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고작 일 년을 함께 살았을 뿐이다. 삶의 층위가 더욱 두터워질수록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담은 점점 허물어져 갈 것이다. 부르고뉴의 가을볕에 왠지 우리의 앞 날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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