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베(Beauvais)에서 브뤼헤(Brugge)까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집이 없었다. 리옹에서 파리로 이사 오면서 집을 구하지 못해 거의 반년 가까이 레지던시와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살았던 것. 집을 찾는 어려움에 스트레스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내 인생에서 가장 물욕 없이 되는대로 살았던 시간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는 시간만 나면 차를 몰고 어디든 갔다. 특히 부엌과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이동거리가 몇 발자국밖에 안 되는 좁은 집에서 남편과 주말이라도 보낼라치면 안 싸우고는 못 배기는 날이 잦았으니 여행을 빙자해 그렇게 밖으로 나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김없이 주말이 돌아왔다. 나가긴 해야겠는데 둘 다 어딜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다 문득 국경을 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을 넘다니, 얼마나 이국적인 단어인가. 어릴 때 지리책에서 배웠듯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가 아닌가. 우리에게 국경을 넘는다는 말은 곧 북한과 연결이 된다. 어릴 때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내게 국경이라는 단어는 이토록 생소하고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일단 북쪽으로 가기로 했다. 작은 도시 보베(Beauvais)에서 점심을 먹고, 베흐크(Berck)와 르투케(Le Touquet), 칼레(Calais)를 따라 해안도로를 달릴 것이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간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즉흥적인 우리 머릿속의 계획일 뿐이므로 변경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보베, 완벽히 중세에 머문 몇 시간
파리에서 출발해 한 시간 반 가량을 달렸다. 배가 고파 차를 세운 곳은 보베(Beauvais)라는 작은 도시. 마땅히 관광 정보도 없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일단 마을의 중심이 되는 교회 방향으로 향하고 본다. 보통은 오래된 교회를 중심으로 빵집이나 카페, 바 등이 광장에 나란히 형성되어 있으니 간단히 배를 채울 수도 있고, 또 유서가 깊은 교회라면 금상첨화다. 오래된 조각이나 그 내력을 살펴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허물어진 돌조각 하나만으로도 그 도시가 마음 깊이 남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삐죽삐죽 솟은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몇 분 전만 해도 잔뜩 구름이 끼었던 하늘이 어느새 파아란 민낯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아래 빛나는 대성당, 바로 고딕 양식으로 유명한 생 피에르 대성당(La cathédrale Saint-Pierre)이다. 이 성당은 참 불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위대한 건축술로 조금 더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중세인들의 야망이 결국 참혹한 결과를 불러들이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1225년에 건축을 시작한 이 성당은 1284년에 제단 천장이 무너지고, 이어 1573년에 135m짜리 종탑이 무너지고야 만다. 이 재앙을 맞이하게 된 데는 당시 고딕 양식의 성당들이 앞다투어 천장을 높여가던 경쟁도 한몫했다. 높고 아름다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찬란한 빛은 곧 신의 속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빛의 미학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둥근 아치형의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끝이 뾰족한 첨두아치로의 변형이 불가피했다.
파리 북쪽에 위치한 생 드니 대성당을 필두로 랭스 대성당 38m, 아미앙 대성당 42m, 거기에 생 피에르 대성당이 48m까지 천장을 높이는 데 성공했으나 12년 후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붕괴 전까지 생 피에르 대성당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성당의 정교하게 조각된 부벽(Buttress)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는 빛의 아른거림을 눈으로 좇는 것도 아름다웠지만, 사실 나를 더 열광케 했던 건 성당 주변에서 펼쳐지던 중세 축제였다. 중세시대의 의상을 입고, 완벽히 분장을 마친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에 몰두해 있었다. 허름한 천막 아래, 지푸라기 위에 그대로 누워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을 때 행색이 너무나 초라해 당신들은 왜 이렇게 있는 거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가난해서라고. 그 외에도 걸인 분장을 하고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이나 중세 시대의 상인 모습을 하고 물건을 파는 사람 등 볼거리가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너무나 신이 나 보였다.
점심도 해결했고, 몸에 카페인도 채웠으니 다시 달릴 차례다. 중세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우리는 북쪽, 망슈(La Manche)를 향해 차를 몰았다.
이상한 기운으로 나를 사로잡는 북쪽의 바다
망슈를 향해 갈수록 구름이 끼고 잔뜩 흐린 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흐델(Le Hourdel)에 잠깐 멈춰 쉬어가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물개를 볼 수도 있을 거라고 남편이 말했다. 그러나 물개를 만나기엔 날이 너무나 흐렸다. 잿빛의 자갈과 하늘, 흙빛의 바다가 내뿜는 끝없는 우울의 기운이 나를 사로잡았다. 근처 카페로 가 자리를 잡고 강한 알코올의 맥주를 마셨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상상한 바다의 모습이 아니다. 흐릴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좀 더 아름다워야 했다. 우리는 해안을 따라 더욱 북쪽으로 달렸다. 이번엔 엷은 빗방울과 함께 강한 바람이 우릴 맞았다. 베흐크(Berck)에 도착한 것이다. 차에서 내리니 해변의 모래가 바람에 실려 얼굴을 때린다.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지만 저 멀리 바다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마침 썰물 때라 발바닥에 닿는 모래의 느낌이 좋았다. 멀리서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바다는 훨씬 더 멀리 있었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희미한 가운데 오직 하얀 포말이 바다의 존재를 각인시켜주었다. 비와 바람을 견디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물웅덩이가 늘어났다. 주위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치 세상의 끝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망슈는 그랬다. 비록 바다를 건너면 영국이 나오겠지만 맑은 날이 드물기 때문에 영국 땅을 볼 일은 흔치 않다. 흐린 하늘에 어렴풋이 해라도 한 줄기 비추는 날이면 분위기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이 기묘해지는데,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는 풍경이었다.
르 투케(Le Touquet)를 지나 위로 달려갈수록 제2차 세계대전의 흔적들이 점점 늘어났다. 곳곳에 콘크리트 요새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주변엔 잡풀들이 무성했다. 망슈를 앞에 둔 해안의 절벽에는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바로 이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아닐까.
마침내 칼레(Calais)를 지나 벨기에 국경이 코 앞이었다. 커다란 이벤트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경'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국적인 이미지마저 산산조각 낼 정도로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바뀐 도로 표지판의 알파벳 정도가 우리가 드디어 다른 나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것뿐이다. 어쨌든 우리는 국경을 넘었다. 지독하리만치 길고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