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자고 이 일을 덜컥 시작해버린 것일까. 그리고 사장님은 어쩌자고 프랑스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날 고용해버린 걸까. 며칠의 수습 기간이 지나자, 그녀는 가게를 내게 통째로 맡기고 한국으로 떠났다. 급히 사람을 구해야 했던 그녀의 사정과, 당장 일을 시작해야만 했던 나의 사정이 맞물린 결과였다.
그즈음 남편과 나는 리옹에서의 2년을 정리하고 막 파리로 올라온 참이었다. 리옹에서의 시간은 따뜻했지만, 모든 것이 서툴렀던 우리가 저지른 실수와 무모함이 우리를 서서히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민자인 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속앓이를 했던 남편은 마침내 번아웃이 왔고,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하느라 마음에 병이 생겼다. 그런 과정을 지나서야 손에 잡힌 일자리였으니, 사장님과 나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두 나라에서 동시에 애를 썼던 셈이다. 그녀가 나 같은 초짜에게 가게를 맡긴 대범하고도 독특한 성격은 후에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신뢰의 밑바탕이 되었다.
나의 유일한 장점이자 수많은 단점 중의 하나는, 임기응변에 강하고 상황이 안 좋을수록 더 내지르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부끄럼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는 성격 때문에 연애는 자주 망했지만, 난생 처음 경험하는 옷 판매라는 일에 있어서는 뜻밖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손님들 사이의 대화를 엿듣고, 방금 들은 표현을 다른 손님에게 곧장 써먹는 식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흡수하듯이, 가게 안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종종 발생하는 오류에 대해서 이해받지 못했으며,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수많은 부끄러움들 중에서 가장 습득하기 어려웠던 건 바로 프랑스어의 악센트였다. 가령, 한 손님이 옷을 입어봤다고 하자. 그럼 보통 “C’est jolie.”(쎄 졸리. 예쁘네요)라고 한다. 발음은 어렵지 않았으나, 높이고 낮추는 그 억양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손님들의 말을 귀 기울여 따라 해보았지만, 어색한 악센트는 이내 공기 속에 가벼운 정적을 남겼다. 프랑스에서 옷을 팔기 위해서는 손님 옆에 붙어서 부단히 주절거려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많은 손님들이 판매원의 적극적인 조언을 원하고, 판매원의 말이 그 분야에 전문적인 사람들의 의견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판매원으로서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는 프랑스어의 악센트에 골몰하느라, C’est jolie 속에 어떠한 진심도 담지 못했다. 말이 어눌해도 그 속에 담긴 진심은 언제나 통한다고 믿어왔는데, 공허한 문장들만이 공기 중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어색한 건 또 있었다. 내가 손님들에게 예쁘다, 옷이 잘 어울린다고 말할 때 프랑스어는 내 모국어가 아니었기에 때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입에서 튀어나가는 자동적인 문장들. 그 안에 나의 감정은 부재했고, 공허한 음절만이 떠돌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위안이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서 불완전한 프랑스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에 와서 언어의 기초는 학교를 다니며 익혔지만 그 언어로 일을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그것은 한겨울에도 등과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맺히는 일, 하루 종일 긴장에 몸이 젖는 일이었다. 말 한마디가 내 자존감을 끌어내릴 수도, 하루를 견디게 할 수도 있었다.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나의 존엄을 가늠하는 저울이 되었다.
그때의 퐁토슈 가는 지금과 달리 조용했다. 길에는 사람도 드물었고, 어떤 날은 한마디 말조차 하지 않고 하루가 끝났다. 주로 나이 지긋하고 여유가 있는 마담들이 손님으로 찾아왔는데, 대부분 영어를 하지 못했다. 내가 프랑스어를 몰라 어쩔 수 없이 영어와 섞어 말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종종 날카로웠다.
“C’est la France!” 여긴 프랑스라고!
지금이라면, “그래서요?” 하고 맞받아칠 만큼 내공이 쌓였지만, 8년 전엔 바로 주눅이 들고 억울한 마음을 표출할 데가 없어 화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던 시절이었다.
‘C’est la France’ 아, 나는 저 문장을 얼마나 경멸했던가. 마트에서 마주친 나와 일면식도 없는 할망구도 내게 저 문장을 읊었다. 심지어 프랑스어를 하면 네 인생이 더 쉬워질 거라고 덧붙이면서. 내 인생을 왜 당신들이 이토록 걱정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당신들은 미국에 가면 영어를, 한국에 오면 한국어를 쓰겠느냐는 반발심으로 부글거렸다.
다인종, 다문화의 사회에서 자꾸만 프랑스어를 하라고 다그치는 사람들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그땐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같은 언어를 말하고, 라이시테(laïcité) 즉 공적인 영역에서는 종교를 철저히 배제하는 프랑스의 정책이, 사회 통합을 유지하는 아주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 시절의 나는 자존감이 한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말을 못하면 웃음으로 때워야했다. 어떤 손님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을 철저히 ‘을’의 자리로 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프랑스는 무례한 손님에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해서 나는 금세 태도를 바꿀 수 없었다. 몸에 밴 친절은 나를 속박했고, ‘항상 미소 지어야 한다’는 강박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 풀렸다.
하루 종일 긴장과 씨름하다 집에 돌아오면 몸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육체보다 정신이 더 쉽게 지쳐 버린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낯선 언어의 세계에서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하루는, 물을 잔뜩 머금은 스폰지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부족한 언어를 메우려고 더 많이 웃었고, 과하게 밝은 척 했던 것들이 집에 도착하는 순간 색을 잃었다. 아무 말도 하기가 싫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동안, 우울이 스며드는 줄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가게에 나갔다. 식은땀을 흘리는 날들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아주 천천히 이곳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를 발견했다. 다른 가게 상인들이 내게 인사를 건넸을 때, 그 인사가 너무도 이국적인 단어 ‘봉주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남편만이 아닌, 이곳의 누군가도 나와 말을 섞어준다는 사실에서 작은 쾌감을 느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언어는 단순히 뜻을 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세상 속에 존재하게 하는 표식이라는 것을. 내가 ‘봉주르’라는 인사를 주고받을 때,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이방인에서 사회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는 의식이었다. 언어는 나를 드러내기도, 나를 지우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서툴지만 분명히, ‘나의 언어’를 찾아가고 있었다.
결국 나를 이곳에 묶어둔 것은 남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든 세계였다. 그 가능성을 퐁토슈 가에서 처음 엿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