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앞에 앉아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개들이 지나갔다. 낯선 얼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오가는 익숙한 개들이었다. 특히 은퇴한 노인들의 개가 그러했다. 그들은 주인과 함께 늙어갔고, 그들의 발걸음은 계절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개 산책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었다. 마치 삶의 윤곽을 드러내는 의식 같았다. 언제 산책을 하는지를 보면, 그들의 일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니엘 아저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병원 검진이나 장 보러 가는 때를 빼곤 언제나 이네스와 함께였다. 비가 오면 이네스에게 낡은 레인코트를 입혔고, 눈이 내리면 빨간 패딩 점퍼를 입혔다. 남루한 이네스가 잠시나마 덜 초라해 보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길에서 혼자 걸어오는 아저씨를 마주칠 때면, 나는 괜스레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졌다.
“이네스는 어디에 있어요?”
그러면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저씨는 왜 오늘 이네스를 집에 두고 나왔는지, 아침에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장면을 봤는지, 그리고 그때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 말의 절반쯤만 알아듣고, 남은 절반은 추임새로 때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조합의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에 아주 조금 통합되었다는 느낌,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던 언어를 이제는 절반쯤 이해한다는 안도감, 더 나아가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있다는 착각. 이방인의 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고작 이웃과 몇 마디 수다를 떨었을 뿐인데, 마음에 이는 파문은 한국에서의 관계보다 훨씬 컸다. 작은 교류에도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고, 그만큼 상처도 쉽게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알았다. 우리의 수다가 아저씨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외로움과 관종 기질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그는 나를 붙잡아두고 일방적으로 떠드는 그 행위를 즐겼다. 이네스는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매개체였다. 사람들과 연결되는 작은 창구.
특히 미국인 관광객들이 이네스를 보고 탄성을 지를 때,
“오 세상에! 저 개 좀 봐. 너무 귀여워!”
하고 외칠 때면,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 서툰 영어로 대꾸했다. 나는 그 순간의 아저씨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생기와 환희가 번쩍이며,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대에 서 있는 배우 같았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귀여워”가 아니라 “너무 가여워”일 것이라고.
퐁토슈 가에는 이네스 말고도 많은 개들이 살았다. 굳이 나열하자면, 이 동네 최고령자 이네스를 비롯해 길모퉁이 약국집 개 지미, 지미의 절친이자 세인트 버나드 종 갸스통, 가게 바로 앞 건물에 사는 차가운 시바이누, 인쇄소 집의 성질 사나운 잭 러셀 두 마리, 걸어 다니는 소시지처럼 통통한 래브라도 쇼콜라, 다니엘 아저씨가 늘 “바보, 머저리(Con)”라 부르던 킹 찰스 스패니얼, 이웃 건물 관리인의 개 올리브,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가수 바네사 파라디 가족이 키우는 퍼그 지네트까지. 열 마리 남짓한 개들이 퐁토슈 가의 비밀스러운 멤버였다.
나는 어째서 이런 거나 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개에 대해서만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
어느 날 어떤 개가 우리 가게 앞에 오줌을 갈겼다. 그 이후로는 모든 개들이 우리 가게를 자기 영역으로 여겼다. 지나가는 개마다 같은 자리에 표시를 하고, 나는 통에 물을 가득 담아 부지런히 그 흔적을 씻어내야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 거리에서 오래 살아온 프랑스 마담이라도 된 듯 스스로를 흐뭇하게 여기곤 했다. 작은 의식이 나를 이 동네의 일부로 만들었다.
삶이 고단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종종 스스로를 영화 속 장면에 밀어 넣곤 했다. 마치 <트루먼 쇼>처럼 어딘가에서 누군가 내 일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상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 파란 대문을 열고 나온 이웃 여자가,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줄리 델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기묘한 감각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녀는 살이 쪘고, 얼굴엔 세월이 묻어 있었지만 단번에 알아보았다. 내가 매일 오가는 퐁토슈 가를 그녀와 함께 걷고 있다니. 삶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가. 환상은 현실에 흘러들고, 현실은 다시 영화처럼 빛난다. 인생을 산에 비유한다면,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오르막일까, 내리막일까. 정상이 있다면 그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가게의 커다란 전면 창을 통해 멍하니 밖을 바라보면 지나가던 개가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카운터에 앉아 낮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약간 달랐다. 개와 눈이 마주치는 각도, 사람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벗어난, 현재 나의 처지와도 같은 세계.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나의 세계, 어쩌면 이곳의 개들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곤 했다.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 이런 생각들이 밀려왔다. 심지어 지나가는 개를 보고도, 다른 이들의 내려앉은 시선을 느낄 때에도,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옭죄었다. 손님이 없으면 빈 공간에 상념들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손님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또 다른 것들이 왔다. 생각은 가게에서 낮게 앉아 있는 내게 온갖 모양으로 찾아왔다.
서로가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찰나의 순간 어쩌면 저 개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과 만약 그렇다면 그게 너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켜켜이 쌓여가는 슬픔의 레이어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드는 내 자존감을 누군가 알아채야만 한다면 그게 지금 나를 보고 있는 회색 털을 가진 개, 바로 너였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회색 털의 개는 우리 가게의 냄새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가게에 자주 놀러 오는 이네스와 지미와 데이지의 냄새를.
그러나 그 사실이 위로가 되기도 했다. 개들은 판단하지 않았다. 비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냄새를 맡고, 걷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세계에서라면 너무나 많은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모든 관계가, 그들에겐 존재 자체로 충분했다.
어느새 가게는 동네 개들의 사랑방이 되어 있었다. 단골 마담의 개가 들어와 화분에 오줌을 갈기고, 서로 으르렁대며 뛰노는 개판의 현장이 되었다.
개들은 퐁토슈 가의 비밀스러운 기록자들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시간의 리듬이었고, 그들의 냄새는 기억의 층위였다. 그리고 나는, 창가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는 이방인으로서, 그 기록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