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아저씨, 퐁토슈 가의 터줏대감과 그의 개

by 경계인

다니엘 아저씨는 내가 일하는 가게의 같은 건물에 사는 분이다. 그는 언제나 작은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를 끌고 다녔는데, 개의 이름은 이네스였다. 털은 엉켜 붙어 뻣뻣했고, 입에서는 악취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저씨는 그 개를 마치 분신처럼 데리고 다녔다.

나는 원래 개를 좋아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피부병이 심한 개를 돈으로 키우고 계셨고, 나는 동물보호단체에 매월 기부를 하기도 했을 만큼 동물 사랑에 유별났다. 그런 내가 이네스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나는 습관처럼 하이톤의 목소리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손을 털 속에 집어넣자 끈적이고 거친 촉감이 손가락을 휘감았다. 쓰다듬어지지 않는 개는 이 개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이어 이네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벌렸을 때, 시궁창을 통째로 끌어안은 듯한 냄새가 내 얼굴을 덮쳤다.

나는 당혹스러웠지만 동시에 궁금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을 하고, 늘 아저씨 곁을 떠나지 않는 이 개의 상태가 왜 이럴까. 개에 대한 애정과 의문이 동시에 다니엘 아저씨에게로 향했다.


이네스를 예뻐한다는 명목으로 쓰다듬고 물을 챙겨주자, 다니엘 아저씨는 매일같이 가게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가게 화장실에는 찌그러진 철제 그릇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롯이 이네스의 전용 물그릇이었다. 나는 이네스가 오면 화장실에서 시원한 수돗물을 가득 받아 주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신 이네스가 얼굴을 세차게 흔들면 엉겨 붙은 입가 털에서 튕겨져 나간 물방울들이 가게 마룻바닥에 진한 원을 그리곤 했다. 그 순간 아저씨는 과장된 손짓으로 외쳤다.

“이네스는 여기 물을 제일 좋아한다니까!”

나는 쓸데없이 뿌듯했다. 수돗물일 뿐인데도, 내가 제공한 그릇에 기꺼이 마셔주는 이네스 덕분에 마치 내 존재가 조금은 필요해진 듯 느껴졌다. 그 작은 순간이 주는 위안. 언어로 연결되지 못하는 외국에서, 어떤 생명에게라도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이네스와 아저씨가 가게에 다녀간 뒤에는 반드시 환기를 해야 했다. 개의 입 냄새와 아저씨의 시가 냄새가 섞이면, 공간 전체가 눅눅한 혼돈이 되었다. 그러나 곧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대환장의 향기조차 퐁토슈 가의 일부였다는 것을.


아빠와 나이가 동갑인 아저씨는 이네스가 그의 전부였다. 그는 게이였고, 마레 지구는 게이들의 공동체로 유명했다. 나는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통해 처음 그 사실을 접했다. 햇살 가득한 보주광장에서 누워 광합성 하던 사람들, 미로 같은 길, 오래된 건물의 그림자들. 내 인생을 저곳으로 옮길 수 있다면, 행복은 더 이상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모래알 따위가 아닐 거라고, 온갖 환상을 뒤섞어 프랑스에 대한 나만의 단단한 오해를 구축했다. 프랑스는 그런 곳이었다. 카페테라스에 와인 한 잔을 두고 옹기종기 앉은 사람들 사이로 무수한 낭만이 스쳐 지나갔다. 그 낭만들 사이에 빼곡히 들어앉은 현실의 문제들을 당시의 내가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이어서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소에서 일을 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게다가 옷가게에서 말이다.


아저씨와 나는 금세 가까워졌다. 사실 대화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그는 말하기 위해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었고, 나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일방적인 수다 속에서 나는 빠른 속도로 프랑스어 욕을 익혔다. 아저씨는 옛 사람들이 쓰던 속어까지 열과 성을 다해 알려주었고, 나는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그것을 흡수했다. 그 욕이 얼마나 천박하고 나쁜 것인지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프랑스인이 아닌 이상 사실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기도 어려웠다. 이때 아저씨에게 배운 욕들은 지금까지도 아주 잘 써먹고 있다. 입에 착 달라붙게 가르쳐주신 아저씨 덕분에 비 내리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다가온 버스에 물세례를 받아도 나중에 억울한 마음 들지 않게 욕을 지껄이게 된 것이다. 누가 욕이 나쁘다고 했는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괜히 마음이 서러운 날이나 자다가 이불 킥이라도 날리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말은 수백 가지가 넘지만 막상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저 몇 문장에 불과할 때, 그래서 마음에 차곡차곡 슬픔들이 쌓여갈 때 찰진 욕만큼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욕은 나를 프랑스인처럼 보이게 했다. 발음이 묘하게 유창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화는 거기까지여야만 한다. 더 나아가면 들통나버릴 테니까.


아저씨는 성질이 고약했지만, 호불호가 뚜렷한 만큼 정이 깊었다. 그는 집에서 구운 크레이프나 비스킷을 예쁜 접시에 담아 가게로 가져오곤 했다. 그것은 순전히 내가 그의 개, 이네스를 예뻐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저씨는 싸구려 버터 비스킷을 사서 가게에 두고는 이네스가 가게에 들를 때마다 주게끔 했다. 처음엔 시키는 대로 했지만 차츰 성가셨다. 매일 가게에 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손님이 오건 말건 지켜보는 아저씨와 그의 늙은 개.

이네스는 이빨이 성치 않아 잘 씹지 못했지만, 끝내 비스킷을 받아먹었다. 그것은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사랑받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한 번은 내가 은근히 충고하듯 말했다.


“이네스 털은 조금 다듬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 날, 이네스는 털을 짧게 자른 채 나타났다. 아저씨가 직접 잘랐다고 했다. 모양은 우스꽝스러웠지만, 나는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것이야말로 아저씨의 방식이었으니까.


이네스와 아저씨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깔끔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어떤 사랑은 남루하고, 어떤 사랑은 서투르며, 어떤 사랑은 타인의 눈에 방치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 개가 원하는 것은 예쁜 옷이나 비싼 사료가 아닐지 모른다. 함께 있어주는 시간, 그 곁에 있다는 확신. 남루한 이네스는 언제나 아저씨와 함께였고, 그것이 전부였다. 아저씨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이네스는 설탕을 조금 얻어먹고, 아저씨가 아는 가게에 순차적으로 들러 아는 척을 할 때 이네스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비록 꼴은 엉망일지라도 그게 아저씨가 이네스를 사랑하는 방법임을 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나는 종종 ‘사랑받는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양식들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랑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당사자들만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퐁토슈 가의 터줏대감 같은 아저씨 덕분에 나는 이 동네의 거의 모든 개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개들은 각자의 주인을 닮아 있었고, 개를 바라보는 방식은 곧 삶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이는 개를 장식처럼 꾸몄고, 어떤 이는 함께 늙어갔으며, 또 어떤 이는 개를 통해 외로움을 견뎠다. 나는 그 다양한 모습들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보았다. 결국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이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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