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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스레 Sep 15. 2020

6.  모든 일엔 때가 있다.

한여름 밤의 꿈


담당 교수님이 한 번은 종교가 있는지 물어보셨다. 심신이 힘들 때 종교가 큰 힘이 될 수도 있다며 신앙생활 추천하셨다 (특정 종교 언급 X). 평소 누군가 종교를 권해오면 뒷걸음치며 경계심을 보이는 편인데, 예상치 못한 대상의 권유였다ㅎㅎ


심신이 한없이 나약해진 상황에서 종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의지가 되고 덜 힘들었을까? 등등 여러 호기심이 생겼으나, 어째 종교 쪽 DNA & 신앙 세포는 제로! 없을 무! 이번 생에는 각자도생이다. 정신 바짝 잡고 마음 단디 먹고, 셀프로 잘 버텨야 한다. 잠깐만요..?! 종교의 힘이 필요한가요?? 의지만으로 버티기 힘든 투병생활이에요?? 헐..


입원 기간 내내 교수님은 진심을 다해 들여다보셨고, 항상 긍정 기운 팍팍 주셨다. '일단 지켜봅시다~ 아직 젊고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괜찮아질 거야'는 교수님의 고정 멘트. 덩달아 간호사님들도 우쭈쭈~ 해주면서 어르고 달래주셨다ㅋㅋ (아무래도 다들 동생뻘 같지만..ㅋ)




병실에서 혼자 꼬물거리며 나름의 시간을 보냈는데, 컬러링 작업 후 작품들 병실 벽에 붙여 꾸미고, 요가 유튜브 보며 홈트, 네일 아트, 브이로그 찍기 등등. 의료진들은 젊은 사람은 다르다며 엄청난 관심을 보이셨다. 드러누워 낮잠이라도 자고 있음 "왜 오늘은 누워있으세요?" 라며 질문이 쏟아짐ㅋ.


완성한 컬러링 (스티커형) 작품들,  이게 뭐라고 기분 전환이 된다 ㅎㅎ


안타깝게도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런 취미생활도 슬슬 접게 되었다. 4주 차에 접어들자 무기력이 덮쳤고, 의료진들도 점점 멘트를 아끼셨다. 그러다 교수님은 최종 결론을 내셨다.


이곳에서의 진료는 더 이상 무의미한 것 같으니 상급 병원으로 가보길 권합니다


강동 경희대병원(2차)에서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했으니 상급종합병원(3차)으로 옮겨 다른 의료진의 진단과 진료를 받아 보자. 상급 병원은 진료 데이터 베이스가 좀 더 다양하기 때문에 새로운 진료 방향&방법 찾기가 훨씬 유리함을 강조하셨다. 덧붙여 이 곳에서는 이식 수술도 불가하고 아무래도 의료 서비스에 한계가 있으니 이쯤에서 상급 병원 가보는 것이 맞다 하셨다.


딱히 방법이 없는 걸 알면서도 교수님의 날벼락 멘트에 머릿속은 복잡했다. 낙관주의염세주의가 극단적으로 오고 갔다. '괜히 큰 병원 가겠어? 완치 사례는 분명 있을 거야~' VS '국내 병원 끝판왕에서도 못 고치면?? 외국에라도 나가야 하나?' 등의 생각들로 뒤엉켜 잠시 일시 정지가 되었다.


반면에 교수님은 당일 퇴원을 컨펌하셨고, 당장 상급병원 외래 예약 잡아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하셨다. 끝으로 앞으로 건투를 빈다며 악수를 청하심. 네에?? 뎅~~


삐그덕 거리는 로봇마냥 악수를 하고 나오니, 빼곡하게 적힌 진료 소견서와 기록들이 출력되어 손에 들려졌고, 희귀 난치 특례를 받아 본인 부담금 10% 감면 혜택 받아 정산도 마쳤다. 순식간에 퇴원 수속이 끝나버렸다. 모야~ 이렇게 허무하게 퇴원? 실화임? 씁쓸함과 걱정이 뒤범벅된 울상이 되어 병원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창문 내리고 바람맞으며 한강을 바라봤다. 그러다 사이드 미러를 봤는데.. 웃고있네유..?? 어머 웬열ㅋㅋ 이러기야??ㅋㅋ 기막혀라. 분명 속 시끄럽고 복잡하건만 왜땜시 머릿속은 온통 '맛있는 녀석들'에 나온 맛집 리스트만 동동~ !! 긴장감 없다 증말..ㅋㅋㅋㅋ


아프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이고 내면이 성숙해지며 으른이 되는..? 이런 성장드라마는 아무래도 남의 일인듯하다. 좌절스런 혈소판 수치에 눈물 찔끔 내다가 돌아서 유튜브 먹방 보며 1분 만에 낄낄거리고, 퇴원하면 언박싱할 택배박스가 일렬종대로 웨이팅 중이다. 뭐 이리 사람이 일관적인지ㅋㅋ 식욕과 물욕은 여전히 왕성하고, 째깐한거에 승질냈다 곰방 낄낄거리는 감정 기복도 변함없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더니.. ㅎㅎ 그나마 다행인 건 코 찌질 시절 보단 내구성이 강해지고, 회복 탄력성도 좋아졌다.



 

집에 와 꼬까옷 걸치는데 감격, 크록스 슬리퍼 벗고 꼬까신 신는데 감동. 오늘 전역하셨어요?? ㅎㅎ 갖은 깨방정을 떨며 양평으로 드라이브. 세미원 산책하고 커피 마시고 화분 하나 사고, 또 하염없이 걷고... 수다 떨고.  

이토록 행복한 일이었나?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더니, 잔잔하고 소박하게 흐르는 평범한 일상이 눈물 나게도 좋았다. 입원 생활이 힘들 때 가끔 이 날의 사진들을 들춰 봤는데 '내게 이런 하루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여름 밤의 꿈같았다.

사부작 걷던 그날의 공기, 바람, 빛, 향기 모두 각인되었다.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서울 아산 병원으로 외래 예약을 잡았다. 처음 와본 아산병원은 일단 규모부터가 압도적이었고, 인파에 밀리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강동구에서 넘어간 시골쥐는 긴장한 탓에 뒷목부터 굳어버려 외래 접수 전에 기진맥진. 혈액 내과에 도착하니 미친 듯이 떨렸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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