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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Sep 22. 2024

집집마다 있는 죽음

죽음에 대한 명상



첫 죽음



“너거 아부지 죽었다.”

엄마 전화를 받고 뛰었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지만 소용없었다. 아버지의 삶은 끝이 났다. 소주와 회를 잘 드시고 자리에 눕자마자 어이없이. 삼일장을 치르고 49재를 올렸다. 끼니마다 빈소에 밥과 커피와 담배를 올리고 절을 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이 시간이 필요했다. 

한동안 아버지 꿈을 자주 꿨다. 생시와 똑같은 모습을 뵐 때마다 ‘아버지는 살아 있다’며 안심했다. 잠에서 깨면 아버지의 부재는 더 선명했다. 허술한 땅을 밟듯, 매일 아버지의 죽음을 꾹꾹 다지며 확인했다. 이때의 죽음은 ‘있던 것이 없어짐’, 상실감이었다.



남의 죽음



여름 방학이었다. 학교로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당직 교사가 "너희 반 얘가 죽었다." 했다.  시골 개천에서 물놀이하다가 사고가 났단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밤톨 같은 아이였다. 짐승 울음이 내 밑바닥에서 올라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엄마도 나도 이렇게 울지 못했다. 죽음과 애도가 낯설기도 했지만, 장례 치르기가 더 바빴다. 제자의 죽음은 달랐다. 내 삶을 위협하지 않는 죽음이었다. 죽음을 거부하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원 없이 울꿈을 꿨다. 늙고 메마른 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뻘밭을 조그만 놈이 혼자 헤매고 있었다. 슬픔은 컸으나 다시 꿈을 꾸는 일은 없었다. 남의 죽음이니까.


중년을 넘기면서 문상 갈 일이 많아졌다. 고인의 삶은 포장되거나, 가끔 저울대에 오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하는 순간에도 조문객들은 '나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깔고 있다. 가끔은 죽음의 대열에 끼어 있음을 기억하는 이가 있었다. 어머니 입관하던 날이었다. 친가의 마지막 어른인 함안 삼촌은 나직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영전에 고했다. “형수님, 먼저 가십시오. 저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익숙한 죽음



퇴직하고, 시골 요양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사계절 내내 꽃밭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르신들은 마지막 삶을 보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감았다. 예정된 이별은 덤덤하다. 침대가 비면 다음 날 다른 환자가 그 자리를 채웠다. 

요양병원은 죽음이 익숙한 곳이다. 일상의 무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둔감해졌다. 타인의 죽음은 오래 기억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잊힐 것이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라지는 것.



어르신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알게 되었다. 죽는 사람도, 곧 죽을 사람도 죽음에 대해 무지했다. 겁내거나 외면할 뿐, 무방비 상태였다. 어르신의  마지막 시간은 제각각이다. 무서워서 눈을 못 감기도 했고, 두려움을 어찌할 바 몰라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짜증과 분노를 뿜어대다 초라하게 눈을 감는 분도 있고, 쓸쓸하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다 가시기도 했다. 대부분은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더러 불안과 원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눈을 감기도 했다. 아름다운 화해를 하고 가시는 분도 드물게 있었다. 살다 보니 살아진 삶이었다. 그렇듯이 죽게 되어 죽을 뿐이었다. ‘호상이다, 좋은 데 가셨을 거다.‘하며 서로를 위로한다만 누구에게 호상인지, 좋은 데는 또 어디를 말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다들 그렇게 얘기했다.  

   



보편의 죽음



입버릇처럼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던 어르신 얘기다.

어느 날 선언했다.

“내, 오늘 밤에 세상 뜰란다.”

같은 방 어르신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했다. 잘 가거라.” 작별 인사가 이어졌다.

그러자 죽기를 결심했던 어르신이 심통이 났다.

“나는 안 갈란다. 나는 못 간다, 나는 못 간다.”


어르신들 대화가 너무 웃겼다. 그런데 고개가 떨궈졌다. 사람은 늙어 죽을 때가 되어도 철없고 무례하다. 





나는 요양병원에서 보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죽는 존재인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이었다. 이태원 참사와 튀르키예 지진을 보며, 공습경보가 일상인 우크라이나, 넘치는 자연재해를 보며, 얼마 전 고속도로 갓길에서 죽어버린 지인을 보며 확인했다. 사람은 누구나 느닷없이 죽는다. 누군가는 죽음을 겪고 절규하는데, 같이 늙어가는 언니는 하소연 끝에 이렇게 말했다. "죽으면 제일 편하겠제?" 철없다. 죽음이 뭔 줄 알고.     



그래서 죽음에 대한 명상도 하는 게 아닐까. 죽음은 산 자에게만 주어진 숙제니까. 그 죽음이 ’딱 한 번 주어진 삶‘의 가치를 알게 했다. 삶은 내 의지와 무관한 무상의 선물이었다. 오늘이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면 ‘이 순간 살아있음’보다 소중하고 고마운 것은 없다. 누구나 겪는 죽음에서 배운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무게와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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