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부모답지 못하면 아이는 성숙해질 기회를 놓친다.
워킹맘,
많은 얘깃거리와 이슈를 낳는 단어이다. 워킹맘의 딸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워킹맘의 딸로 사는 것의 불편함을 안다. 혼자 참아내야 하는 게 많고, 독립적 여야 하고, 혼자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워킹맘이 되면 어떤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딸아이를 낳기 전부터 나는 일을 했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고 세 살이 될 때까지는 껌딱지처럼 붙어서 육아를 하다가 근질거리는 천성을 참지 못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직장에 매여 있을 때는 오히려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의 밸런스를 어느 정도 잘 맞췄던 것 같다.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이도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여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법을 익혔던 것 같다. 그렇게 고맙게 자라서 열여섯이 되었고 엄마보다도 큰 키로만 봐서는 어른이다. 또 대화를 해보면 속내도 꽤 듬직하다.
갱년기가 찾아오면서 나는 아이가 이제 다 큰 어른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갱년기의 부모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아이의 감정을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다, 아이의 사춘기 감정보다 자신의 갱년기 언밸런스에 더 압도되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글쓰기로 갱년기를 극복하고 있다. 일하며 받는 스트레스와 인생 중반에 해결해야 할 현실의 혹 들이 머릿속에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래서 마음의 쉴 곳을 찾아 나선다는 게 글쓰기가 되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표현예술치료인 셈이다. 나에겐 이 치료법이 꽤 효과가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샌가 마음이 안정된다. 창의성을 발현하는 작업이니 기쁨이 올라오기도 한다. 글로 털어냈으니 다시 채우고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이의 식사를 꽤 잘 챙기는 엄마였다. 그런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집에서도 일하는 모드로 돌아섰다. 집중하는 시간을 놓치기 싫은 나머지 아이에게 "잠깐만 기다려봐" 혹은 "냉장고에 뭔가 있으니까 알아서 차려먹을래?" 하는 일이 늘어났다. 심지어 불에 음식 올려놓은 걸 깜빡 잊고 냄비 채 태워버린 적도 있었는데 이런 일이 한두 번 만은 아니란 게 문제다.
어제는 아이와 깔깔거리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내일은 휴일인데 뭘 먹을까?"로 메뉴를 정해 보는 중에 "엄마, 근데 요즘은 왜 밥을 맛없게 해?"라고 하는 것이다. 요즘은 내가 해주는 밥이 맛이 없단다 "네가 사춘기라서 그렇지. 원래 그때는 입맛이 없어"라고 했더니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순간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아이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표정을 읽지 못하고 대화의 허리를 뚝 잘라 나의 관심사로 점프해 버렸다. "내일은 어떤 주제로 글을 써볼까?" 아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야겠다며 방을 나갔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 전에 나를 돌아보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 딴 거 쓰지 말고, 밥 좀 맛있게 해 줘!!!"
아뿔싸!!! 딸아이 마음엔 불이 났었구나! 눈이 시큰거리고 심장이 뛰었다. 역시 '엄마'라는 사람은 동등해지기 이전에 더 크고 현명한 사람이어야 하나보다. 16살... 사춘기. 16살 사춘기 아이는 어른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과의 갈등을 심각하게 겪고 있을 나이이다.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 같은데, 몸은 어른이라 어른스러운 행동을 해야 할 것 같고. 몸, 마음, 머리가 각각 따로 노니 혼란스러울 지경일 것이다. 워킹맘의 아이들은 독립적이다. 그래서 엄마들이 착각을 한다. 아이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다 큰 줄로... 부모가 부모답지 않으면 아이는 아이답지 않게 되고 더 독립적인 행태로써 자신의 결핍을 숨길 수 있다.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는 아이에게 안전한 대상이 되어줘야 한다. 딸은 그 대상인 내가 잠시 다른 것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빼앗겼다'(상실감)고 느꼈던 것이다. 다행히 마음을 표현해준 딸아이가 고맙다.
사춘기 아이들은 받아줄 안전한 대상이 없으면 자기표현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마음에 구멍을 메우지 않고, 뚫린 채로 오래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것이 결핍이라는 상처로 굳어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결핍을 메우기 위해 방황한다. 떠남으로, 물질(쇼핑, 술, 담배, 약물, 게임중독)로, 대상으로.... 이러한 마음의 결핍이 관심과 사랑으로 촘촘하게 채워졌을 때 아이들은 성숙해질 수 있고 자기 자리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부모 눈에는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상에서의 일들로 생긴 마음의 구멍이 채워지지 못한 사람들은 '어른 아이'가 되기 쉽다. 가만히 있어도 허전한 공간에 바람이 들어가니 마음은 시리고 춥다.
아이의 뻥 뚫린 마음을 메워줘야겠다는 생각에 분주히 음식을 준비한다. 엄마의 맛있는 밥이 자기를 사랑하는 거라고 믿는 딸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의 마음은 오늘도 한 뼘 정도는 자라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