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 인해 주말 약속이 취소되면서, 뜻밖에 하루의 여유가 생겼다. 계획에 없던 시간이지만,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가까운 부산으로 하루 여행을 떠났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마음에 요즘 가장 애착이 가는 700원짜리 마트 장바구니 하나를 챙겼다.
부산 여행의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구도심으로 정했다.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의 가장 큰 재미는 그곳이 해외든 국내든, 오래된 거리 속에서 시간을 걷는 데 있지 않던가. 보수동 책방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오래된 서점들 사이를 둘러봤다. 서점 안은 사람이 한 명 겨우 다닐 정도의 좁은 통로뿐이었지만, 어깨 높이까지 쌓인 책들을 만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무심코 집어 든 책은 “카네기 인간관계론”. 어쩌면 예전에 읽은 적 있는 책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양한 출판사의 판본이 진열돼 있어 어느 것을 고를지 잠시 망설였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이게 제일 좋아”라며 한 권을 내밀었다. 그 책을 포함해 제목만 보고 혹한 몇 권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비닐봉지 한가득 담긴 책들은 다시 나의 장바구니 속으로 들어갔다.
책방골목을 나와 이번엔 깡통시장으로 향했다. SNS에서 오래된 야구 유니폼을 파는 가게 이야기를 봤던 터라 궁금했다.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이것저것 구경하던 중, 오래된 양가죽 서류가방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별생각 없이 가격을 물었더니,
상인 아줌마가 말했다.
“오늘 하나도 못 팔았는데, 이거 하나 팔고 집에 들어가려고 싸게 줄게.”
생각보다 괜찮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가방 바닥에 약간의 흠집이 보여 조심스레 흥정을 시도했다.
“오천 원만 깎아주세요.”
그러자 아줌마는 웃으며 말했다.
“안 돼~ 그러면 원가에 주는 거야. 총각이 흥정 안 할 줄 알고 낮게 부른 건데.”
사실 꼭 필요한 가방은 아니었지만, 내 안의 도전심이 불붙었다. 이제부터는 심리전이다. 시장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상인의 내공이 있을지언정, 나도 한때 흥정의 나라 중국에서 물건을 사고팔던 사람 아닌가.
잠시 가방을 살펴보다가 다시 제자리에 걸며 한마디 툭 던졌다.
“마음에 드는데… 아쉽네요.”
그러자 아줌마가 곧장 말했다.
“아이, 그래? 그럼 오천 깎아줄게.”
결국 오천 원을 깎아 산 내가 승자인지,
나에게 지금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나에게 판 아줌마가 승자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방을 손에 쥐고 작은 승리를 맛본 나는, 새로 산 중고 서류가방에 골목에서 구한 책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비닐봉지보다 묵직한 가죽가방의 감촉이 손에 남아, 하루 동안의 소소한 여정이 한층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순간의 도전과 흥정, 그리고 낯선 도시에서 건진 소소한 행복이 이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어 준다.
가끔은 이렇게 계획에 없던 시간이, 삶에 가장 오래 남는 선물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산에서 건진 ‘하루의 여유’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