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 그리고 다락의 기억

소소한 주말

by 중년의 모험가

주말 아침 처음 집을 나설 때는 동대문 헌책방 골목을 둘러보고, 그 주변을 한적하게 산책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도로를 막고 행사가 한창이었다. 음악과 소음이 뒤섞인 풍경 속에서, ‘오늘은 조용한 산책은 어렵겠구나’ 싶었다. 발길을 돌려 청계천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어느새 동묘역 풍물시장에 닿았다.


시장 안은 활기가 넘쳤다. 이십대 청년들부터 육십이 넘어 보이는 어르신들까지, 세대가 뒤섞여 한바탕 장을 이루고 있었다. 옷더미 속에서 보물을 캐듯 옷을 뒤적이는 사람들, 오래된 전자제품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는 사람들, 그 속에 섞여 나도 한참을 헤맸다.

그러다 문득, 헌책방 앞에 펼쳐진 낡은 책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히 한 권, 두 권을 뒤적이다가 《대망》 1~3권을 발견했다.

순간, 오래전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어릴 적, 살던 집의 다락방은 책으로 가득했다. 먼지가 희미하게 떠다니는 그 공간엔 책 냄새가 늘 밴 듯했다. 그곳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던 책이 바로 이 《대망》이었다.

나는 아직 어려 그 내용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은 기억한다. 아마 조부님이, 혹은 아버님이 읽으셨던 책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다락방의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번의 이사를하고 아버님이 나이를 드시면서 다락이 있는 집은 아파트로 바뀌고 책장은 다섯 개에서 네 개 세 개로 줄어들다 이제는 두 개만 남았다. 그 안의 책들은 아버님의 인생에 영향을 준 책들이거나, 언젠가 내가 삶의 어느 시점에 닿으면 건네주고자 남겨두신 책들이다.


그 기준으로 보면, 《대망》은 그 목록에서 제외된 책이었다. 조부님과 아버님의 기준에는 들지 못한 책.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지난번 대구 헌책방 골목에서도 이 책을 마주쳤을 때부터 마음이 끌렸었다.


오늘 다시 이 책을 발견한 순간, 오래된 다락방의 공기와 그때의 시간들이 내 안에서 조용히 깨어났다. 잊고 지냈던 기억 한 장이, 낡은 종이 냄새를 타고 내 곁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그날의 다락, 그날의 책, 그리고 지금의 나.


모두가 한 줄의 시간 속에서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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