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3. '존버'는 승리가 아니라 마취제

월급은 내 야성을 거세하는 가장 강력한 마취제였다.

by 중년의 모험가



120살까지 살 건데, 강남 아파트가 대수인가요?

“O 팀장, 이제 나이가 있는데 왕복 두 시간 출퇴근 힘들지 않아? 회사 근처 강남에 아파트 하나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

주변 지인들로부터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농담 섞인 대답으로 응수하곤 하죠.

“저는 120살까지 살 건데, 앞으로 회사 얼마나 더 다닐 수 있다고 제 노후를 강남 아파트에다 다 쏟아붓겠습니까?”

하지만 웃음 뒤에는 늘 서늘한 질문이 남습니다.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중독되어 반복하는 이 출퇴근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공포입니다. 지금 당장 새 직장을 구해야 한다면 이 나이에 가능은 할지, 회사 일에만 몰두하느라 정작 나만의 능력에는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릅니다.


회사가 평생을 보호해 줄 거라는 착각

중년을 훌쩍 넘긴 주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치 직장생활이 앞으로 20~30년은 더 남은 것처럼 소비를 늘리거나 새로운 부동산에 투자하는 모습을 봅니다. 회사가 평생을 보호해 줄 거라 믿는 듯한 그들의 확신이 내심 의아하지만, 그 두터운 믿음에 찬물을 끼얹을 용기가 없어 함부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합니다.

나는 단지 회사에 모든 것을 의존하기에는 내 나이가 이미 정년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월급이라는 달콤한 유혹은 영원할 것만 같지만, 사실은 내 야성을 거세하는 가장 강력한 마취제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 달콤함에 취해 있다가 어느 순간 마취가 풀리고 급여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제야 닥쳐올 현실의 통증에 당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하철 선반 위에 두고 내린 아버지의 가방

정년퇴임을 하고 돌아오시던 길, 고민에 빠져 지하철 선반 위에 가방을 놓고 내리셨다가 분실물 센터에서 겨우 찾으셨다는 아버지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막연하게나마 무엇인가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달 입금되는 급여 알림은 나를 현재의 안락함에 중독시켜 실천의 발걸음을 묶어버리곤 했습니다.

최근 승진 경쟁에서 밀려 갑작스럽게 자리를 떠난 선배들을 만났습니다. 인사 명령지에서 남들과 똑같은 순간에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뒤 느꼈던 당혹감을 털어놓으시더군요. 가족을 지탱해 준 회사에 대한 애정과, 한순간에 밀려난 현실 사이에서 복잡한 표정을 지으시던 그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회사 이후의 삶'을 철저히 준비해야 할 때라는 것을요.


마취가 풀리기 전, 각성제를 들이켜다

경제적인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이들의 교육비를 줄이기도, 당장 생활 수준을 낮추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직업적인 고민도 깊어졌죠. 대기업 사무직 업무를 살려 밖에서 곧바로 써먹을 뾰족한 기술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급여가 사라진다면 말로만 듣던 '빈곤한 은퇴자'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마취 기운이 가시고 나면 진짜 통증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믿습니다. 당장 뛰어난 기술이 없더라도, 지금부터 내가 잘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발전시켜보려 합니다. 건강과 재테크 활동도 냉정하게 점검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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