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티 자판의 허영과 빨간 새가 가르쳐준 신세계
하지만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녁 늦은 시간,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울리는 '띠링' 소리. 혹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나들이를 떠난 야외에서 마주해야 했던 긴급 업무 메일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 대던 그 이메일 수신음은, 블랙베리가 멋진 액세서리가 아니라 나를 24시간 일터에 묶어두는 디지털 족쇄임을 일깨워주었다.
당시의 블랙베리에는 지금처럼 화려한 앱 생태계가 없었다. 그저 PC에서나 하던 생산성 프로그램들을 작은 화면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했고, 나에게 그것은 스마트한 도구라기보다 언제 어디서든 일을 해야만 하는 '들고 다니는 사무실' 그 자체였다. 퇴근 후에도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진동 환청은 나를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만난 두 번째 스마트폰, 갤럭시 S1은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의 핸드폰 제조사들이 스마트폰을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몸을 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소통의 비용이었다. 건당 비용을 내야 했던 문자 메시지 대신 '카카오톡' 같은 무료 메신저 앱들이 등장하며, 블랙베리가 주지 못했던 자유로운 소통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가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완벽하게 매료된 결정적인 계기는 뜻밖에도 업무가 아닌 엔터테인먼트에 있었다. 바로 '앵그리버드'였다. 온 정신을 집중해 손가락 끝으로 각도를 조절하고, 빨간 새를 날려 목표물을 부술 때의 그 쾌감. 단순한 퍼즐 게임이었지만, 막 스마트폰이 보급되던 시기의 물리 엔진과 터치감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마우스 클릭으로 나만의 도시를 건설하던 '심시티'가 청소년기 나에게 PC의 신세계를 열어주었듯, 손바닥만 한 기기 안에서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조종하고 파괴하며 퍼즐을 풀어나가는 이 단순한 유희는 업무용 도구로만 인식되던 스마트폰을 '최고의 장난감'으로 탈바꿈시켰다. 훗날 영화로 제작될 만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게임은, 나 같은 디지털 이민자들에게 스마트폰이 '일하는 곳'이 아니라 '즐기는 곳'이 될 수 있음을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가르쳐준 최고의 스승이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이 가속화되면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앱들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는 기존 PC 기반의 아이러브스쿨이나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빠르게 대체해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더 이상 무거운 PC 앞에 앉지 않게 되었다. 손안의 작은 화면 속에서 나의 인맥과 정보, 그리고 즐거움이 모두 해결되는 '모바일 온리(Mobile Only)'의 시대는 그렇게 나의 일상이 되었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나는 이 기기가 주는 편리함에 완벽히 길들여졌다. 하지만 익숙함이 정점에 달했을 때, 다시 한번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PC와 인터넷, 스마트폰이 그랬듯, 이번에도 이름조차 낯선 새로운 존재가 나의 새로운 놀잇감으로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