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벽, TV 드라마에서 잊었던 감성을 찾다
설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하는 드라마가 많은 요즘이다. JTBC 시지프스, 괴물, TVN 빈센조를 챙겨 보고 있는데, 그중 연기, 연출, 음악 취향이 가장 맞는 드라마는 “괴물”이다. 신하균이 출연하고, 좋아하는 경찰 수사물이라서 보기 시작하였는데 연기자뿐만 아니라 연출, 음악이 좋아서 찾아보니, 작년 여름 우연히 새벽에 보게 된 JTBC 단막극인 “한여름의 추억” 연출을 한 심나연 감독 작품이다. 이렇게 결이 다른 드라마들 연출하는 감독이라는 사실에 놀라웠고, 독특한 감성이 가득했던 “한여름의 추억”을 왓챠에서 다시 찾아봤다.
[드라마 기본 정보]
제목: 한여름의 추억 (2017년 12월, 2부작)
연출 : 심나연 / 극본 한가람
출연: 최강희, 이준혁, 태인호, 이재원, 최재웅
내용: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서른일곱의 라디오 작가의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가슴 시리게 아팠던 사랑의 연대기를 섬세하게 그린 드라마(네이버)
37살, 12년 차 라디오 작가 한여름의 출근길은 다소 정신없고 지쳐 있는 듯하다. 쨍한 햇살이 그녀를 더욱 마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여름의 출근길 뒤로, 그녀와 사귀었던 남자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대학교 CC였던 회사원, 최근에 사귀었던 라디오 PD, 한여름의 첫사랑이었던 고등학교 선배, 그리고 가장 진지하게 사귀었던 음악 칼럼니스트 이렇게 4명은 한여름과 사귀었던 남자들이다. 한 여름에 미국 언니 집으로 여름휴가를 떠난 그녀는 강도 사고를 당하고, 죽은 지 3일 후에 발견된 쓸쓸한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한 4명의 남자 친구들, 각자의 기억 속에서 추억하는 그녀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2017년 12월 한겨울에 방송된 JTBC 단막극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지난 2020년 8월 더웠던 어느 새벽에 우연히 봤다. 감성적이지만 또 한편 현실적인 대본,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 그리고 한여름의 정체성을 오롯이 보여주는 그녀의 집과 패션이 오랜만에 드라마에 집중하게 하였다. 그때 이렇게 메모하였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이 어느새 30대 후반이 된 여성의 이야기는 아직도 울림이 된다. 한여름이 미국으로 휴가를 가면서 햇살 아래 단단하게 서 있는 신에서 나온 아래 스크립트가 참 인상적이었다.”
“풍경 가득 푸른 잎이 출렁이고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진 뒤
찌는 듯한 더위 매미 소리 따가울 즈음 무너질 듯 폭풍우 오고 나면
어느새 코끝 찡한 바람이 솔솔
너는 나와 함께 했던 시간 내내 어서 내가 지나가 주길
성큼 다음 계절이 다가와 주길 바라고 바랐겠지만
이것 봐 나는 그리 길지 않아, 이렇게 찰나인 걸”
한여름은 지난 연애를 통해서, 내숭만 떨면 아무도 내 진심을 몰라준다는 것, 헤어지자는 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기 욕심 때문에 상대방의 진심을 짓밟으면 벌 받는다는 것을 배웠다고 동료 PD에게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요 외로워요, 외로워서 누가 내 이름 한 번만 불러만 줘도 울컥해줘요,
밥 먹었냐는 그 흔한 안부인사에도 따뜻해져요.
스치기만 해도 움찔하고, 마주 보기만 해도 뜨끔하고, 그러다 떠나버리면 말도 못 하게 시려요.
그런 저한테 그쪽이 연락을 주고받는 수많은 여자들한테 이런 짓 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한번 실패한 다음에 무엇도 가지려 들지 않는다는 거 저도 알고 있어요. 그렇치만 왜 실패를 나아가는 성장판으로 삼지 않는 거죠”
그리고, 선배 언니에게 농담으로 자기의 장례식에 지난 남자 친구들을 초대해달라고 농담하면서 말한다.
“엄청 빛났던 것 같은데, 단숨에 초라해졌어.”
이렇듯 드라마는 10년 이상 사회생활을 한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이라면 공감할 만한 대사가 가득하다. 나도 역시 그랬다. 나 자신에게 충실하게 열심히 산 것뿐인데, 어느덧 주위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나를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엄마는 걱정 가득한 말을 끊임없이 하고. 어느새 나 자신도 지치고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들에 휩싸이게 된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30 대 후반의 나도 참 빛났던 순간인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었다. “한여름의 추억”은 이러한 나의 30대 후반을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였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결정들을 후회하고 나의 어리석었음을 끊임없이 복기하던 그 찰나를 말이다. 드라마는 “한여름의 사고”라는 극단적인 장치를 추가하였지만, 그녀는 쓸쓸하고 외로웠던 그 순간을 잘 이겨낼 수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비행기를 떠나보내는 정비사의 손인사에 화답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녀이기에 …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달리기 신”에서 감독과 작가는 한여름이 본인에 대해서 느끼는 현재를 영상으로 보여준 것 같다. 4명의 남자 친구들 과의 시간 속에서 한없이 빛났던 그녀가,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건네 준 운동화 때문에 넘어지고 아무도 그녀에게 달려오지 않는 그 순간에 대한 연출을 통해서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이 느끼는 ‘불안하고 보잘것없는 현재”를 너무도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다. 배우 최강희는 일상의 순간을 아주 잘 표현하는 좋은 연기자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한여름”은 마치 나의 곁에서 자신의 하루를 소곤거리는 친구와 같다. 그리고, 그녀는 드라마에서 사고를 당하기 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구겨서 버린 편지 속에, 두 갈래로 찢긴 사진 속에,
평생 열지 않을 상자 속에, 삭제된 메일 함 속에, 고함 한번 지르고 온 바닷속에,
그리고 언젠가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 속에
그러니 그곳에서 가끔 울고 있을 때도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한여름의 추억”은 왓챠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