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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Oct 24. 2019

브런치에 보내는 편지

2019년 가을

늘 그랬습니다.
인생에 가장 큰 이정표였던 아버지에게 막내딸인 내가 사회에서 살아가고, 성장하며 결혼하고 평범하게 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기억될 부족함 없는 사랑을 주고 가셨지만, 생각이 짧고 모자란 것 투성이었던 나의 20대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내 부족한 모습만 보고 떠났다는 생각에 늘 아쉬웠습니다.

나의 아버지

나 자신이 꽤나 트렌디하다는 오만한 착각과 꽃길만 걷는 줄 알았던 명품 바이어 생활 끝자락에 겪은 Lehman Brothers 사태에 먼 나라 이야기가 나에게 직면한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저 예쁘고 좋은 제품을 수입하면 되는 줄 알았던 무지한 나에게 환율 폭등 폭탄은 내가 얼마나 관세며, 무역분야에 머리가 텅텅 빈 인간인가 뼈저리게 느낀 일이었습니다. 언론고시를 준비 한 나의 친구들이 최선을 다해 공중파 PD가 되었을 때, 논술에서 떨어지고 바로 다른 길을 걸었던 나는 그저 부러워만 할 뿐 다시 해 볼 자신감도 실력도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

결혼 후, 10년 가까이 아이가 없던 우리 부부에게 애정 어린 관심과 과도한 호기심에 쏟아졌던 자녀 계획 질문은 늘 기운이 빠지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지금의 15명의 직원을 책임지는 회사가 되기까지 부모님 도움 없이 결혼반지를 판 보증금으로 시작한 역삼동 사무실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남편과 해외 출장이 많은 내 직업적 특성에 주변 사람들 관심에 귀 기울일 정신도 없었지만, 고생 끝에 차츰 자리를 잡아가며 여유를 찾았을 땐 덜컥 정말 아이가 안 생기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나를 짓눌렀습니다.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땐 정말 어른의 나이로 느껴졌던 40대도 여전히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어른스러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나간 내 시간을 돌아보니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간다고, 중간에 넘어졌다고, 조금 억울한 일을 겪었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더군요. 아무리 힘든 일도, 억울함도, 서글픔도,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괜찮아졌습니다. 그리고 이건 누구에게나 같은 것 같습니다. 마치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나이가 드는 것처럼 말이죠. 요즘 나는 여전히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지만, 아들의 질문에 조금이라도 답을 해 주고 싶어 억지로 책을 읽습니다. 좋아하는 문학서적과 달리 경제 서적이나 심리학 책은 진짜 억지로 가 맞을 것입니다. 나의 영어 선생님은 24살 대학생인데, 아이 엄마인 내게 영어 공부 왜 하냐고 묻더군요. 늘 일에 필요한 수준의 영어만 간신히 했던 나이기에 쓰지 않으면 바로 다 잊어버려 실력이 늘 제자리걸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40대에 그냥 조금 관심을 갖고 한다면, 한 60대엔 네이티브 되지 않겠냐고, 그럼 나에겐 학습지 역할이던 원서도, 자막 없이 보는 영화도 무궁무진할 것 같다고 대답했네요.


나도 그리고 우연히 지나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올 한 해 힘들거나 아픈 일들은 훌훌 털어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2019년을 마감하시길 바랍니다. 가만히 있어도 나이를 드는 것처럼 어떤 일도 다 지나가고 우린 또 웃게 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공감하고,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먹고 :)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래야 언젠가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해 드릴 이야기가 많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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