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녹아 사라질 때까지
우리가 만나던 시절, 그는 가난했다.
이놈의 가난, 지긋지긋해.
그는 유머러스한 남자였고, 그런 말조차 익살스럽게 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주 보고 크게 웃곤 했다. 멋있는 남자였다. 그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걸 본 적도 있다. 아무래도 나는 그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그가 사는 곳에 가끔 들렀다.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그는 오이소박이와 김을 좋아했다. 밥상이 없어서 박스를 엎어놓고 밥상처럼 썼다. 그는 가난했으니, 없는 건 밥상 말고도 많았다. 가끔 나는 내 형편에서 살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사서 들렀다. 부엌용 가위, 플라스틱 컵, 초코파이 한 상자 같은 것들. 그는 초코파이를 냉동실에 얼려두고서 비상식량으로 이용했다. 얼린 초코파이 두 개면 아침 대용으로 그럭저럭 괜찮다고 했다.
초코파이는 얼려야 맛있거든.
그의 말을 들으면 정말 그럴 것 같았다.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나도 얼린 초코파이를 즐겨 먹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를, 아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여름이면 그는 커다란 아이스커피 믹스묶음을 집에 구비해 두었다. 그는 아이스커피를 즐겨 마셨다. 작은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아이스커피를 만들었다. 가끔 얼음만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기도 했다. 냉동실에 있는 두 개의 얼음통은 금방 비었다. 그의 집에 들를 때마다 냉동실을 열어 얼음이 남아 있나 확인하고 얼음통에 물을 채워두는 것이 내 일이었다.
얼음을 빼 먹은 만큼 물을 채워놔야지 왜 매번 빈 얼음통이냐고 잔소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얼려둔 얼음을 내가 없을 때 그가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전기세 때문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잘 틀지 못하는 그가 냉동실에 가득 있는 얼음을 양껏 먹을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할 지경이었다.
물을 얼리는 것, 그토록 사소한 행위가 당시 내가 그를 위해 했던 사랑이었다. 사랑은 그토록 사소하게 표현된다. 그 사소함 안에 엄청난 행복감이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로 인해 사소한 사랑의 기쁨을 알았다.
그와 한참 동안 만나지 못할 일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그의 집에 들러서 냉동실에 초코파이 상자를 넣어주고, 얼음통 두 개 - 역시나 비어 있었다 - 에 물을 가득 채워 넣었다. 정말로 한 개의 얼음도 남지 않아서 스스로 이 통에 물을 채워야 할 때까지, 두 통의 얼음으로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얼음을 꺼내 먹는 대로 물을 채워 놓으라며 늘 하던 잔소리를 했다. 한시적인 이별이라 믿었으므로, 쿨해야 한다는 것을 무슨 지상명령인 양 여기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헤어졌다.
얼마 후 그의 메일이 도착했다. ‘잘 지내냐, 나는 잘 지낸다’ 류의 심상한 안부 뒤에 붙은 마지막 두 문장.
얼음은 맨날 뽕뽕 빼 먹어서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보고 싶다.
그는 얼음을 꺼낼 때마다 내 생각을 했나 보다. 나도 가끔 상상을 했다. 얼음은 얼마나 남았을까. 마침내 그가 스스로 얼음통에 물을 채워야 할 순간이 왔을 때를 떠올리면, 마치 그와 헤어진 듯 가슴이 쓰려왔다.
그런데 정말 얼음이 얼마 안 남았구나…….
그 생각은 불길한 예고처럼, 우리의 진짜 이별이 임박했다는 사인처럼, 내 안에서 울렸다. 그래서 미친 듯이 그가 보고 싶었다. 아마 그도 그러했으리라 믿는다. 그가, 얼음을 채워주던 내 마음을 알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나의 ‘그토록 사소한 사랑’이었음을 그가, 이해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폭풍처럼 몰아친 내 잔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매번 내가 채워줄 때까지 빈 얼음통을 고수해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얼음통을 채웠던 내 마음만큼, 얼음통을 비워두었던 그의 마음 또한 사랑이었을 거라고. 그러니 내가 미친 듯이 그가 그리운 지금, 아마 그도 미친 듯이 내가 그리울 거라고.
참 이상한 일이지만, 예감은 종종 현실이 된다. 그와 나는 진짜로 헤어졌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오히려, 사랑해서였을 수도 있다. 서로의 앞날을 배려해 주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나쁘게 헤어진 게 아니어서,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싸우고, 실망하고, 할퀴고, 그래서 서로의 더러운 바닥까지 보고 난 후의 이별은, 환멸은 클지언정 그리움에 몸부림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와 나의 경우는 반대였다. 그는 여전히 좋은 남자였을 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남자였다. 단지 우리가 더 이상 애인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를 그리워해야 했다.
냉동실의 얼음통을 채워놓을 때마다 나는 그를 생각했다. 얼마 남지 않은 얼음을 보며 나를 생각했던 그를 생각했다. 그의 메일을 읽으며, 비어가는 얼음통을 떠올리며, 가슴이 덜컥하던 느낌을 기억했다. 나는 혼자서 그런 시간을 오랫동안 견뎌야 했다. 아마 그도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열이 많은 체질의 그가 얼음을 와그작거릴 때, 잠깐이라도 나를 그리워할 거라는 생각이.
그 사이 나는 몸이 아팠다. 한의원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다. 나의 체질은 그와 반대였다. 몸이 찬 나에게 얼음은 금기였다. 찬 음식은 나에게 독과 같다는 주의가 주어졌다. 나는 주의사항을 잘 지키는 모범생이었다. 아니, 모범생이 아니었다 해도, 몸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일단은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다.
여름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도리어 바깥이 뜨거우면 속이 차가워지기 쉬워서, 오히려 여름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뜨거운 커피만 마셨다. 얼음을 얼릴 일도, 얼음을 넣어 아이스커피를 만들 일도, 커피 속 얼음을 와그작거릴 일도 없었다.
나의 실연은 나의 삶에서 얼음이 빠져나가는 과정과 겹쳐졌다. 아이스커피의 맛이 더 이상 그립지 않을 무렵, 그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음을 문득, 깨달았다.
전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제 가난하지 않다. 자랑스럽게도 한때 내가 좋아했던 남자답게, 남자를 보는 내 안목이 부끄럽지 않게 자기 분야에서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가 앞으로도 잘나갈 거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멋진 남자였으니까.
그는 지금도 얼음을 와그작거리며 나를 생각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래도 섭섭하지는 않다. 나 역시 그를 떠올리는 일이 드물어졌고, 그가 생각이 나도 예전처럼 마음이 따끔하지는 않으니까. 이제 그는 자신의 집 안에, 컵만 가져다 대면 찬 얼음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고급 얼음 정수기 정도는 구비했을 테니까. 혹 지금 그의 옆에는 종알거리며 아이스커피를 만들어주는 귀엽고 착한 여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연하다. 그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는 것이다. 못 견디게 그리웠던 그 남자의 얼음 씹는 소리가 잊히는 것처럼, 얼음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 이 글은 저의 네번째 책 <저지르고 후회해도 결국엔 다 괜찮은 일들>(예담(위즈덤하우스), 2014)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제 안에서 바삭거리는 장면입니다.